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 안혜령 편집위원
  • 승인 2017.09.25 14:31
  • 수정 2017-09-25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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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부모님 슬하에서 엄격한 교육 받았던 유년시절
우물을 냉장고 삼아 갖가지 장아찌로 알뜰한 살림 꾸린 어머니 손맛 물려받아

우리 아버지는 약주를 참 좋아하셨다. 더러 논산 장에라도 다녀오신다든지 하면 술을 드시고 오시곤 했다. 옛날에는 남자들이 밖에서 술을 마시다가 첩도 얻고 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가문에는 본시 첩이라는 게 한 사람도 없을 뿐더러 어머니가 가만 계시지 않았다.

내가 아들을 못 낳아줘서 당신네 집에서 아들을 못 키운 것도 아니고, 당신이 한의사이면서도 자식을 못 키웠고, 그러니 다른 마누라를 얻으면 저기, 대추나무, 감나무, 뽕나무가 집에 잔뜩 있었으니까, 가서 목매달아 죽는다고 어머니가 종종 그런 엄포를 놓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너의 엄마가 저렇게 지금 나한테 엄포를 놓는데, 대추나무에서 목매달아 봐라. 그냥 나뭇가지만 뚝 부러지지. 그래서 내가 믿어주는 척하니까 진짜로 믿는 줄 안다, 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어머니를 사랑하셨고 부부가 참 정이 좋았다.

 

사람차별 않고 깔끔, 넉넉 결곡했던 어머니 성품 물려받아



시조를 함께 읊으시다가도 아버지는, 참 당신은 나한테 시집을 왔지만, 여러가지 자태라든지 학문이라든지 내가 당신을 황진이 못지않게 본다고 노상 말씀하셨다. 옛날 양반네들이 어디 자기 부인을 그런 식으로 칭찬했는가. 그랬는데도 아버지는 진짜였는지 빈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어머니를 아끼셨다.

사실 우리 어머니는 참으로 예쁘셨다. 또 성품이 결곡하시고 엄하셨다. 아버지는 너무 호인이신 데 반해 어머니는 그렇게 예쁘신 만큼 도도하고 깔끔하셨다. 어머니 평생 어디 한 번 앉을 때 푹 주저앉는 걸 내가 본 적이없다. 나는 생긴 것은 아버지를 닮았지만 상당히 결곡한데가 있는 걸 보면 성격은 어머니를 많이 닮은 모양이다.

우리 집은 살림이 컸다. 집이 한 5백평 되었고, 부리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머슴도 애기 머슴부터 해서, 젖머슴이라고 원래 우리 집에 살고 있는 머슴도 있고, 철따라 일하는 사람들이 따로 왔다. 요새로 말하면 아르바이트한다고 할까, 그때그때 일하고 돈 받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여럿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돈이 아니라 아마도 쌀도 가져가고 벼도 가져가고 그랬던 것 같다. 또 행랑채가 있어서, 우리 집 일을 돕는 부부들이 살았다. 뽕나무밭 있는 덴데, 싸리문이 두 개니까 행랑채도 두 개가 있었던 것 같다.

나한테도 나를 따라 다니는 몸종 같은 여자애가 하나 있었다. 금순이라고 불렀는데 나하고 동갑이었다. 늘 내심부름을 해주고 내가 어딜 가든 따라 다니면서 나를 돌봐 주었다. 금순이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하셨고, 금순이 아버지는 우리 사랑 일을 보셨다. 금순이 남자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나한테 누나라고 안 부르고 맨날 애기씨라고 했다. 금순이하고는 학교도 함께 다녔는데 그 남매들 공부는 아버지가 맡아 하셨다.

그런 큰 살림을 하는 사람답게 어머니는 손도 크고 마음 씀씀이도 넉넉하셨다. 어떤 식이냐 하면, 옛날에는 먹을게 귀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식구들끼리 뭘 먹다가 누가 오면 감추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 짓을 절대 못하게 하셨다. 집에서 인절미를 해먹는다든지 엿을 고아 놓고 먹는다든지 할 때 이웃에서 누가 오면 절대로 감추지 못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다 함께 먹어야 했다. 작은 집 식구나 심지어 행랑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콩 한 알이라도 쪼개면 큰 걸 남을 주라 그러셨다.

어머니는 또 제사 지낼 때 보면 그 한 달 전에는 절대로 고기를 잡숫지 않았다. 제사고 잔치고 우리 집에 일이있을 때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으레 동네에서 소를 잡든가 돼지를 잡든가 해서 집에 보냈는데, 그걸 전부 우물 속에 집어 넣으셨다가 모아 가지고 동네 잔치를 여셨다.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은 물론이고 동물도 다 줘야 한다고, 개 밥그릇에도 기름이 끼어야 한다고 하시며, 개까지도 고기 국물 넣어서 밥 말아서 주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베푸시는 성격이셨다.

우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머니가 살림을 얼마나 잘하셨는지 내가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있다. 우리 집에 우물이 모두 네 개 있었다. 하나는 나물도 씻어 먹고 하는 보통 우물이었고, 또 하나는 말하자면 식수용이었다. 집이 크다 보니까 집 안에 바위도 울퉁불퉁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조그만 바위 밑에 모래가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 글쎄, 우물이라기보다는 샘이라고 해야 할까. 찬삼내기라 불렀는데, 모래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이 나오는 희한한 샘이었다. 그 찬삼내기에서 나오는 물이라고 하면서 박을 가지고 그 물을 살짝 떠 먹었다. 아주 얕지만 굉장히 찼다. 요새로 말하면 생수란 게 바로 그 물이었던 같다. 또 보통 등목할 때 쓰는 우물이 하나 있었고, 특이한 게 냉장고용 우물이 따로 있었다.

 

‘비범’과 ‘평범’의 차이점

예화로써 가르쳐준 아버지




박이 옛날에는 큰 것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어릴 때 생각으로는, 내가 대여섯살쯤 되었을 때 기억이니까, 팔을 두르면 한 열명이 둘러야 될 만큼 그렇게 컸던 것 같다. 그렇게 큰 박을 위를 딱 끊었다. 끊어서는 속을 다 파내 가지고 말렸다. 그 윗부분은 뚜껑이 되는데, 뚜껑하고 박 아래 몸통을 모시나 뭐로 엮어서 끈을 매어 우물 속에 띄웠다. 마른 박이니까 우물에 가라앉지 않고 잘 뜰 게 아니겠는가. 그런 박을 많이 띄워서, 참외고 수박이고 집어 넣었고, 농사도 그런 식으로 우물 속에 넣어서 먹었다. 우리가 염소를 길러서 한 댓마리씩 잡았던것 같은데, 염소를 잡아서 북어찜 하듯이 양념을 해서는 그걸 집어 넣고 박을 띄우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게냉장고였다. 고기 아니라 무얼 해넣어도 상하지 않고 보관할 수 있었다. 그게 어머니의 아이디어였다.

고추장도 그렇게 많이 담그셔서, 무릇쌈, 질경이, 더덕은 물론이고, 조기도 다 고추장에 장아찌를 담아서 먹었다. 나도 그걸 지금 그대로 하고 있어서, 우리 집에는 장아찌가 십년 이상 묵은 게 잔뜩 있다. 일년이면 으레 장아찌 고추장 한 말 담그고, 그냥 먹는 고추장 한말 담근다. 아무리 바빠도 고추장만큼은 서너말씩 담궈 가지고 매년 장아찌를 해놓고 있다. 지금은 내가 서양 음식에 많이 길들여졌지만 칠팔십년대에 해외에 패션쇼를 하러 다닐 때면 그 장아찌들이 요긴한 반찬이 되었다.

옛날 추억을 돌이켜보자니 문득, 아가, 나가서 돗나물 좀 뜯어 와라, 하시던 어머니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면 돗나물 조금씩 뜯어다 냉국해서 먹고. 돗나물뿐인가. 집 안에서 가지도 먹고 오이도 해먹고. 더덕도 뒷곁에서 자라서 해먹고. 더덕밭에 진동하던 그 짙은 향기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머니는 참 엄하셨다. 나는 평생 남의 집에 가서 자본 적이 없다. 사촌들이 그렇게 많아도 작은 집에서 밥 한끼 얻어먹어 본 적도 없다. 어머니가 절대 그런 짓을 못하게 하신 것이다. 작은집이나 행랑채에서는 쑥개떡이니 밀보리설 같은 걸 잘 해먹었다. 나는 늘 그런 게 먹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가서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셨다.어쩌다가 그런 양반들이 애기가 좋아한다고 살짝, 어머니 몰래 갖다 주기도 했는데 철저히 비밀이었다. 그런걸 행랑들이 갖다 줘서 먹는걸 어머니가 알면 절대 안 되었다. 만일 슬쩍슬쩍 거짓말이라도 했다가는 나는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고상하신 분이셨는데, 어쩌다가 내가 말대답이라도 한 마디 한다든지 하면 막 방망이를 가지고 달려드셨다. 그토록 내 교육에는 엄중하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늘 “쟤는 자중해서 잘 길러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는 진솔한 교훈은 아버지가 들려주신 것들이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이야기 중에 두 가지가 특히 기억난다. 하나는 솔거에 관한 것인데, 솔거가 그림을 그렸을 당시에는 그 그림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솔거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훌륭한 작품을 미처 몰라보고 칭찬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 그러나 그 분은 자기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어떤 음악가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에 관한 책을 사다 주셨다. 다 읽고 나자 감상이 어떻더냐고 물으셨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아버지가 얘기하신 것은 지금도 기억에 있다. 그 음악가가 단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내 음악에 심취될 수 있다면 기꺼이 이 음악을 연주하겠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었다.대중적인 작품이야 얼마든지 누구나 다 감상할 수 있지만 훌륭한 작품은 미처 그 경지를 못 따라가기 때문에 관객이 없을 수 있다, 특출난 것과 평범한 것의 차이가 그렇게 어려운 거다, 그런 얘기를 늘 하셨다. 내가 사주가 세다고 염려하셨던 것이다. 팔자가 세니까 특출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린 마음에 아버지는 항상 자애롭고 부드러우셨고, 어머니는 늘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엄격하고 대범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활달하고 말괄량이였지만 온 집안 내리사랑은 내차지



내가 태어났을 때 내 위에는 열두살이 많은 언니가 하나 있었다. 내가 일곱살 되었을 때 언니가 시집을 갔고, 나는 거의 외동딸인 양 자랐다. 언니는 자랄 때 할머니 차지였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자식들을 만져 볼 시간도 없었고, 작은어머니 작은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성격이 다들 별쭝맞다고, 점잖은 집에 웬 돌연변이가 나왔냐고 할 정도로 여자애 치고는 야단스러웠는데, 언니는 성격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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