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인가 공갈인가.”

지난 5월 30일 김영삼 대통령 담화를 보고 난 국민들의 반응은 얼떨떨하다. 크게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야당의 92년 대선자금 공개요구를 이번 대통령 선거를 향한 ‘압박전술’로 보는 시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의 담화 내용대로 “아들까지 구속된 마당에...”라는 동정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불가피’나 ‘불가항력’을 호소했다면 국민들이 넘어가지 않았을까.

결과론이지만 모양이 좋지 않았다. 대선자금 의혹은 그간 여러차례 제기됐었다. 93년 사정개혁차원에서 진행됐던 전 동화은행장 수사과정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중 일부가 92년 대선전에 김영삼후보로 넘어갔다는 단서가 잡혔으나 검찰이 서둘러 덮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태우씨의 장남인 노재헌씨가 “92년 대선때 아버지가 김영삼 후보에게 줄만치 주었다”는 말을 했다. 당시 불편한 심정을 표출한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갔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이런 내용에 대해 검찰도 계속 수사를 할 수 없었고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때가 바뀌었다. 지난해 말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로 청와대와 여당이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보가 부도났다. 정부, 여당의 ‘부도상태’에서 은행과 재벌이 부도상태로 몰렸으니 ‘겹초상’이 난 셈이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터진 것이 소위 ‘김현철 비리’다. ‘국정논단’이니 ‘자식의 수렴청정’이니 어려운 한자말까지 등장했지만 결과는 별로 명쾌하지 못했다. 검찰이 ‘현 대통령의 차남’을 구속한 것은 그간의 관례로 보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미 2명의 전 대통령까지 감옥에 있는 것을 잘 보아왔다. 김대통령의 결단력으로 봐선 좀 더 아들의 ‘증여금 탈세’보다는 국정개입부문과 92년 대선 개입부분을 밝히도록 검찰에 지시할 것을 기대했다. 김현철 수사과정에서 문제가 된 ‘한보의 8백억 대선자금 증여설’의 진상이 어느정도 밝혀지리라고 기대했다. 검찰은 더이상 못하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동아, 조선일보는 계속해서 “정태수 총회장이 검찰 초기수사에서 김후보의 측근인 서석재 의원에게 거액의 대선자금을 주었다”고 검찰수사관에게 진술했다는 설을 실었다. 이에 서의원이 발끈해 언론중재위에 제소해 지난달 24일 2차 중재회의를 가졌으나 결렬됐다. 때문에지난 30일의 대통령 담화내용에 관심이 쏠린 것이다.

극적인 요소는 또 있다. 야당이 계속 대선자금 공개를 물고 늘어지자 여당의 예비후보들이 조금씩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때까지만 해도 ‘법대로’를 외치던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김대통령을 만나고 나와 “뒤로 넘기자”라는 취지를 밝히고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제는 이대표까지 싸잡아 ‘공범’취급을 했다. 이대표가 중국에 있던 사이에 청와대가 ‘담화발표’로 태도를 바꾸었다. 귀국 후 이대표는 “말리는 시어미”로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김대통령은 ‘국민에 드리는 말씀’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내용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국민들은평소 김대통령의 사투리 발음을 놓고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TV가 아니라 신문에 나온 활자를 보고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중대결심’을 놓고 설왕설래했다. 이것이 ‘하야론’인지 ‘정계개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 아닐지. 국민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야당이나 특정 정치인물이나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국민들이 이해하는 순서만 남았다. 김대통령이 비장한 어조로 정치개혁을 하겠다고 공언 했으니 그 부분을 믿어보겠다.

그러나 정치개혁의 요체는 선거자금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담화는 ‘동어반복’이다. 김대통령이 정치개혁자로 역사적인 평가를 받기를 원한다면 결국 자신의 92년 선거자금부터 밝혀야 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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