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핸드백에는 어발이의 삐삐가 전지약이 빠진 채 잠자고 있다. 우리는 며칠전 어발이의 삐삐를 압수하게 되었다. ‘내’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나 혼자의 결정이 아니라 우리집 식구들이 공동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이에 동의했고 어발이 조차 선선히 삐삐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어발이는 중학교때 친구랑 친구가 아는 누나랑 만나서 놀다가 교보에 들러서 책도 사고 저녁도 먹고 8시까지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3시쯤 나갔는데 밤 11시에 들어온 것이다. 삐삐를 쳤는데 응답도 않고 너무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온 식구가 너무 화가 나서 “너는 더 이상 삐삐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압수를 했다.

저녁 8시에 전화를 하면서 30-40분쯤 후에 집에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9시가 되어도 10시가 되어도 연락이 없었다. 30분에 한번씩 삐삐를 쳤지만 응답이 없었다. 깡패 만나서 돈 뺏긴 두달 전 상황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느 골목에서 곤혹을 치르지 않나 온갖 걱정을 하면서 나중에는 거의 5분에 한번씩 삐삐를 쳤다. 그래도응답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저녁 먹기로 한 친구 집으로 연락을 했더니 뜻밖에도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누나가 약속을 취소해서 그애는 집에 있었다.

어발이가 집에 없어서 삐삐에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메모를 남겼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지 더욱 걱정이 되어 음성메모도 남기고 나중에는 삐삐를 거의 1분에 한번씩 쳐댔다. 어발이 친구한테는 다시 전화를 해서 찾아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성질 급한 나는 음성메모에 ‘○○랑 한 저녁도 취소되었는데 연락 좀 집에 빨리 하라’고 다시 메모를 남겼다. 아이 아빠는 어발이의 사생활도 보호해 주어야지 왜 친구에게까지 어발이가 증발했다는 이야기를 하느냐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어발이가 돌아와서 만약 친구랑 저녁을 먹은 것처럼 이야기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과 그런 상황을 어떻게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20번도 넘게 삐삐를 쳤음에도 응답이 없더니 친구가 친 삐삐에는 곧장 응답을 해서 상황파악을 하고 그때에야 전화를 해왔다. 저녁 약속이 취소는 되었지만 이왕 외출나온 김에 자기반 친구를 불러내어 이야기하고 놀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나. 나중에는 시간이 너무 늦고 대책이 없으니까 삐삐가 와도 무시하고 무작정 놀고 있었던 모양이다. ‘너도 참 대책없는 아이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발이는 발동이 걸리면 제어가 잘 안되는 아이다. 일단 놀기 시작하면 노는데 신바람이 들어서 빨리 멈추지를 못한다. 지난 주에 어발이 학교는 축제기간이었다. 목요일은 연극 공연이 있으니 출연자들에게 꽃다발을 주어야한다고 설치고 다음날은 자기가 록 공연을 취재해야 한다고 들떠서 다니고 마지막 날은 축제정리에 서클선배들이 다 모여 판을 벌리게 되었다고 밤11시에 집에 왔다. 모처럼 책가방과 야간 자율학습도 없이 한 사흘을 신나게 보낸 것이다. 학교공부에 들볶여 제대로 사는 것 같지도 않던 아이들에게 이런 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보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워낙 매어 살던 아이들이라서 일단 제동 장치가 풀리면 어려운 모양이다.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는 연습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니까.

나는 어발이 학교의 축제를 구경가고 싶었지만 끝내 시간을 내지 못했다. 구경 다녀온 친구 어머니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디에 그 재능들이 모두 숨어 있었는지 “기도 안찼다”고 했다. 록 공연을 보니 “TV에서 본 그대로”였고 연극공연, 합창 등등 분장에서 노래솜씨까지 기성 탤런트나 가수들을 뺨칠 정도였다고 감탄했다. 당신아들이 기타를 그렇게 잘 치는지 몰랐다면서 덧붙이기를 “그쪽으로 나간다고 할까봐 걱정이에요”그랬다. 아이들의 세대는 “그렇게 될수 없어서 걱정이지 될 수만 있다면야”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발이로 말할것 같으면 공연을 할 만큼은 재능이 없고 귀는 트여서 축제기간 내내 공연장 휩쓸고 다니다 그래도 에너지가 남아 돌았는지 일요일 저녁의 연장전까지 가버린 것이었다.

삐삐를 압수한 뒤 식구들은 모두 약간의 불편함 속에 잠자리로 갔다. 그런데 잠이 들려고 하면 어딘서인지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뭔가 오래된 우리집 전기선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쳤고 이제 괜찮겠구나 생각하면 또 다시 드르륵하는 괴음이 한동안 계속됐다. 서너번 되풀이 되자 안되겠다 싶어 그래도 우리집에서 전기를 좀 아는 큰애를 깨우러 갔다. 그러고 보니 큰애도 그런음을 들은것 같은데 조금전 1층 거실에서 였다는 것이다.

‘오래된 냉장고의 모터 때문일까? 아니면 지하 보일러실에 문제가 생겼을까’한참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발이가 튀어나왔다. “혹시 제삐삐 엄마가 1층 거실에서 가지고 있다 2층 엄마방으로 가지고 가시지 않았어요? 아마 삐삐의 진동음일거얘요.”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삐삐는 울지 않는 대신 내 핸드백 속에서 진동을 하면서 몸살을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완전히 끄는 스위치를 못 찾겠다면 전지약을 빼어 버리라고 말해준 것은 어발이였다.

내방으로 돌아와 어발이 삐삐에서 전지약을 빼내고서야 드르륵 소리에서 해방 되었고 조용히 잠들수 있었다.그러고 보니 어발이와 나는 전연 다른 두세계에 살고있는 것이다. 삐삐는 그 다른문화의 상징적 기점에 있다.그래서 난 선뜻 압수한 어발이의 삐삐 번호까지는 취소하지 못하고 있다. 한동안 애태운 생각에 속상해서 부모 마음 아는 아이 없다더니 어쩌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이의 마음을 아는 엄마는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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