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 안혜령 편집위원
  • 승인 2017.09.25 13:23
  • 수정 2017-09-25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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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전문직여성 길 독려 받고 ‘한복 명품화’에 일생 바쳐
학문 조예깊은 한의사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서 시조·한문 배우며 성장

경복궁 돌담을 끼고 삼청동으로 향하는 길은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의 하나일 것이다. 한켠으로는경복궁 돌담이 정감있게 잇대어 있고, 다른 한켠으로는 사간동 화랑가를 거느린 이 길의 아름다움 속에는 그런 역사와 문화의 향취가 어우러져 있다.

동십자각, -비록 경복궁에서 따로 떨어져나와 대로변에 어정쩡하게 나앉은 형상이 늘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그 누각을 돌아들면 광화문 앞 대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조차 한풀 가라앉는 듯하고, 그래서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만나게 되는 길다운 길이 이곳이다.

 

5백여평 큰 터에 자리잡은

5대 봉사 ‘큰집’서 성장




그 한갓진 길, 화랑들과 프랑스문화원이 있는 사이에 이리자 전시관이 있다. 일층은 매장이고, 이층부터 사층까지는 ‘출생부터 임종까지’라는 주제로 이리자씨가 만든 한국인의 의복일습이 전시된 전시장이고, 오층 꼭대기에 그이의 살림집이 있다. 이 살림집 거실에서는 경복궁 돌담과 경복궁 경내, 멀리 북악의 기운찬 산줄기마저 한눈에 들어오니, 허구헌 날 시멘트담을 바라보고 사는 입장에서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이리자씨는 삼십년이 넘도록 한복을 만들어 왔다. 그이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한복계를 대표하는 사람이요, 전통 한복의 변형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 한복계의 발전을 성큼 끌어올린 장본인으로 인정받는다.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쳐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거의 파괴되고 사라지면서 시장제품과 삯바느질로 명맥을 이어가던 한복을 되살려냈을 뿐 아니라 한복의 전문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그이의 삶을 되짚어 본다.



사실 나는 내 나이 칠십을 넘기면 자서전을 쓰고 싶었다. 워낙 바쁘고 고단하게 살아오기도 했고, 스스로 돌아볼 적에 그래도 나름대로 이룬 바가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환갑 넘기고 삼년밖에 안 된때에 자서전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풀어 놓으려니 민망함이 앞선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고, 준비도 덜 된 듯 싶어서이다. 그러나 기억력이 이만큼이라도 생생할 때 지난날을 차근차근 정리해 두는 것도 좋겠다고 마음을 정했으니, 이제 예순세해 내 삶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내가 태어난 때는 1935년 음력 5월 단오날이었다. 우리 집은 5대 봉사를 맡아하는 큰집이었다. 증조할아버지까지 9대째 진사 벼슬을 하셨던 집안으로, 원래는 공주 효계가 고향인데, 할아버지 때 갑오년 난리에 피난을 내려오셔서 논산군 두만면 향안리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연산 못 미쳐 두계 바로 아래로 신도안 근처다. ‘향안’이라 한 내 호는 고향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 동네에 일가가 다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제일 큰집이니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가 모시고 있었고, 나 어려서는 한 집에 계시던 작은아버지들이 결혼을 하시고 나서도 내내 이웃에 사셨다. 삼종숙부 되시는 분들도 계시고, 보통 십촌 이상 되는 집안들이 참 많았다. 심지어 십이촌되는 이들도 있었을 정도니. 옛날에는 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더니 향안리에는 전주 이씨가 많이 살았다.

비록 다른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집은 아직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나고 자란 집이라 내 자식들을 데리고 한번 다녀왔는데, 터가 한 5백평은 됐던 것 같다. 그만한 평수면 지금 세상에도 넓다고 할만한 땅이지만 옛날에는 정말 굉장히 크게 느껴졌었다. 어린 눈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친구들하고 숨바꼭질을 할 때면 어느 구석에 가 숨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막막해지곤 했었다.

 

독학으로 한의사 되신 아버지,

대전서 명의로 명성 자자




아버지는 함자가 ‘이종하’이시고 어머니는 ‘백채순’이시다. 어머니는 판서 집안의 따님인데, 외삼촌이 둘에 이모가 한분 계셨으니 사형제셨다. 어머님 친정은 연산이었다. 아버지하고는 두살 차이로, 아버지가 열아홉살 때 열일곱에 시집을 오셨다. 그때로서는 퍽 늦은 혼인이었던 셈이다. 두 집안이 다 글을 읽는 집안이었다. 게다가 외가는 만석꾼이라든가 천석꾼이라든가 하는 큰 부자집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의사 공부를 하고 계셨는데, 내가 일곱살 땐가 개업을 하셨다. 개업하시기 전에 서울에 있는 천일약국이라는데서 일호 약사로 한 일년 일하시고는 대전에다 한약방을 차리신 것이다.

아버지는 달리 학교 공부를 하신 게 아니고 계룡산에 들어가셔서 한의학을 독학하셨다. <동의보감>이라든지 하는 옛날 책을 당신이 다 베껴서 공부를 하셨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그 책들은 지금도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독학을 하셨지만 그토록 정성을 쏟아 공부하셔서 대전에서는 명의 중에 한 분이셨다. 그 당시에 늑막염이니 맹장염 같은 병은 퍽 어려운 병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병들을 잘 잡아내고 고치셔서 대전시에서 감사패라든지 훈장 같은 것도 받으셨다.

아버지는 5남매의 맏이로, 작은아버지가 네 분이고 고모가 한 분 계셨다. 나를 낳으시기 전에 제일 위에 딸을 하나 낳고 가운데로 아들을 넷 낳으셨는데 그 네 아들이 다 죽었다. 아들 넷이 다 죽었다니 하도 기가 막혀 어떻게 죽었느냐고 물어보니 거의 홍역하다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한의사 공부를 하고 계시던 중이었는데, 그렇게 다 죽었다고 한다.

아들 넷이 죽고는 애가 영 안생기는지라 대가 끊기는가 싶어서 어머니가 태백산에 들어가셔서 백일기도를 다드리셨다고 한다. 백일기도 뒤에 다시 천일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집안이 원래 불교 신자인데다 아이를 바라는 마음에 어머니가 절을 많이 지으셨다. 계룡산 국사봉에 솔아주머니라고 하는 분을 통해서 절을 한 서너개 지어주신 일이 생각나고, 나도 어려서 따라갔던 기억이 살아 있다.

천일기도를 드리고 나서 승몽을 하셨다고 한다. 젖이 땅에 닿도록 몸집이 큰 암퇘지가 새끼돼지들을 많이 거느리고 내려오는 그런 꿈이었다고 한다. 꿈속에서도 어머니는 ‘아, 여자 애기를 점지해 주시는구나’ 그런생각이 나셨단다. 그리고 실제로 딸아이를 낳으신 것이다.

내가 35년생인데 그해는 돼지띠다. 돼지띠에다가, 어머니가 돼지 태몽을 꾸셨고, 해시에 태어났다. 어머니 말로는 돼지밥을 줄 때 나를 낳았다고 한다. 일꾼들이 모를 심고는 참을 먹고나서 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어올 때가 해가 질 무렵 어두컴컴할 땐데, 그때 나를 낳으셨다는것이다. 나를 막 낳고나서 정신을 차리는데 돼지 울간에서 쪼르륵 돼지밥 주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그때가 8시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딸을 낳아 놓고 나서 두 분이 딸 사주를 보셨다. 아버지야 한의학을 하시니까 학문이 퍽 깊으셨고, 우리 어머니도 참 깊으셨다. 두 분이 다 공부들을 많이 하신 부부인데, 당신네끼리 보통 육갑을 짚어 보더라도 딸이 사주가 너무 셌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사주가 세면 과부가 안되면 두서너번씩 시집을 간다고 했다. 또는 술집 여자나 다방마담 같은 일을 한다고도 했다. 요새 말로 하면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건데 그때는 그런일을 퍽 천하게 보던 때였다. 그러니 두 분이 걱정이 많으셨다. ‘공부 열심히 해서 크게 성공 안하면 참 팔자가 드세겠다’항상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아들 넷 잃고 천일기도후

암퇘지 꿈꾸고 출산




어려서부터 아버지 말씀이 ‘네가 사주가 상당히 세다, 일부종사할 그런 형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나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은 평범하게 남편한테 얻어먹고 살 팔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때문에 그렇게 공부 잘하라고 말씀 하셨던것 같다. 너는 공부를 아주 잘해서 꼭 여의사가 돼야 한다, 아버지 대를 네가 이어서 여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를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가 다 요즘 말하는 일류병에 걸리셨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공부 잘하라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못하게 하셨다. 명이 짧아진다는 것이었다.

 

사주탓에‘여의사 길 독려,

부모와 많은 대화 나눠’




두 분은 직접 나를 가르치시기를 좋아하셔서, 두 내외가 드러누우시면 늘 시조를 읊으면서 그 뜻을 나한테 설명해주셨다. 내외가 누우셔서 아버지가 '청산리 벽계수야’하고 한 수 읊으시면 어머니가 ‘수이 감을 자랑마라’하고 받아서 읊고, 그렇게 시조를 잘 읊으셨다. 그러면 내가 그 가운데 쏙 들어가 누워서 시조도 듣고 이야기도 들었다. 밤에 식구들끼리 대화가 참 많았던 셈이다.

또 한문을 많이 가르치셔서 내가 <소학>까지는 못 읽었지만 <천자문>하고 <명심보감>, <동몽선서>는 다 읽었다. 아무튼 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자를 다 읽을 정도였으니. 아버지는 그런 책들에 나오는 글씨를 가지고 늘 설명을 해주셨다. 책도 많이 사주셨는데 요새로 말하면 영웅집 같은 책이 많았다. 여자애한테 왜 그런 책들을 사주셨는지 모르겠다.

한 일곱살까지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교육을 많이 받은 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한다. 그 교육의 내용이라는 것이 주로 사람이 형성되는 진리였던 것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내가 태어남으로써 우리집에는 딸만 둘이 되었는데, 아들 없다는 소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커서 알게 됐지만 어른들 말씀으로도 우리 가문에는 원래가 첩이라는 게 없었다. 대대손손이.

아버지 형제가 넷인데 제일 큰 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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