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쳐다보면 숫자 12개가 있다.

그 간단한 12개의 숫자가 우리들 인간의 복잡다단한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람들을 바라봐도 느낌은 마찬가지.

눈 두개, 코 하나, 입 하나, 그리고 몸통.

어찌보면 간단할 수도 있는 외형을 가진 사람들.

그 내면은 어찌 그리도 복잡다단한가!

50세가 넘도록 독신을 고수하는 선배가 있다.

물론 확실한 자기일을 가지고 있으니 그녀의 독신은 어떤 면에서 오히려 화려하다.

그러나 그녀를 보면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말이 진리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직업이 없었더라도 아마 혼자 살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녀의 짱짱한 성격은 절대 구부러지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고 반듯하다 못해 ‘똑!’소리가 날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언닌 꼭 11시 11분 같애”라고 말한다.

언덕위의 소나무도 비바람을 벼텨낼려면 구부러지고 휘어지기도 하련만 어찌하여 그토록 꿋꿋하기만 할수있는지?

말하자면 그녀는 혼탁한 이 세상에 확실하게 서있는 우리들의 기둥인 셈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 정신 바로 세우기 따위의 ‘세우기 운동’을 구태여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지금 곧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그리고 신문, TV를 한번켜보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6시9분 같은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더럽고 추악하기가 10시 18분 같은 사람, 쳐다보면 저절로 욕이 나오는 12시 12분같은 사람, 칠칠맞고 헤퍼서 7시 7분 같은 사람, 흥분 잘하고 싸움전매 특허낸 8시 8분 같은 사람, 평화롭기가 9시 9분 같은 사람, 만날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5시5분 같은 사람...

시계와 사람을 몽탸쥬해서 바라보면 그가 몇시 몇분 같은 사람인지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독신주의자 나의 선배는 때때로 오해도 받는다.

이 세상이 자기 혼자만 살아가는 독무댄줄 아나봐?

두리뭉실, 호락호락 어울리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눈을 흘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주위의 시선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휘는 법없이 똑바로 서서 산다.

말하자면 그녀의 생존방정식은 ‘무릎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분류 또한 명명백백하다. 현재 마음의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 액면가, 현찰이라고나 할까? 좋아도 그 표정, 싫어도 그 표정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3개월짜리 어음이거나 당좌수표다.

나는 그렇게 똑부러지는 선배가 소중하게느껴진다.

세속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을 순도높게 보존시켜 나가는 그녀에게 인간문화재의 칭호라도 붙여주고 싶다.

물론 나는 주관이 뚜렷하지 않아서 호박처럼 둥글둥글 살아가는 사람도 존경스럽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 또한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심이 없는 나는 회사에서 회의할 때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한다. 누가 아이디어를 내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어떡하지? 내겐 이 사람 말도 맞고 저 사람 말도 맞는데?”

그러나 사람관계에서만은 확실한 편식주의자다.

많이 사귀기 보다는 마음의 빛깔, 영혼의 무늬가 같은 사람들이 더 좋다.

아마도 순도높은 관계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물질이 끼면 견디지 못하는 것도 못말리는 나의 편식때문이다. 사람관계처럼 오묘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그것이야말로 인간예술이 아니겠는가?

멋진 화음이 어우러지는 오케스트라에 난데없이 들려오는 파열음 처럼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들과의 만남은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물론 개성이 다른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서로서로 다른 개성은 권장사항일 정도로 소중하다.

내가 말하는것은 존재 근원의 순수와 비순수, 까망과 하양의 차이.

아무튼 11시 11분처럼 늘 곧게 서있는 열정을 소유한 나의 선배를 나는 좋아한다.

직립(直立)의 매무새로 반듯하게 살아가는 나의 선배.

나는 그녀를 좋아할 뿐 아니라 내 인생의 거울로 생각한다.

자주 내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투명한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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