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온 보트피플.

생명을 내걸고 남쪽으로 찾아온 그들을 보며 무작정 기쁨 100%가 될수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 생각없이‘반가워요’라고만 말할수 없는 현실.

50년대 이후 계속 이어지는 북녘탈출은 90년대부터 급증하기 시작해서 어느덧 8백20여명에 다다르고 있다.

귀순자들이 밝힌 탈출동기도 시대별 차이가 있다.

60년대엔 북한체제 불만등 이념적 동기였던 것이 80년대 이후부턴 인권문제, 생존문제 등으로 변하고있다.

너도 나도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김정일의 웃음을 생각해본다.

그 공허한 웃음은 무엇을 보고, 누구를 향해 터뜨리고 있는 시한폭탄인가.

철모르는 아이에서 부터 74세 철학자 황장엽까지“더이상 북한은 사람 살 곳이 아니다”라며 떠나고 있질 않은가.

몇몇 지식인들은 말한다.

이판 사판 막판까지 가면 김정일은 쳐들어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 위해 그는 지금 착실히 전초전을 진행중이다. 귀순자들은 그가 보내는 첩자들일 수 있다. 이곳 저곳 균형있게 세팅 작업중이라는 것.

물론 무엇이 진실인지 우리는 알지못한다.

그러나 귀순자들의 밝은 모습과 건강한 표정들, 괜찮아 보이는 옷차림 등은 웬지 그런 의견에 맞물려 의아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얼마나 슬픈 비극인가.

먹을 것이 없어서, 자유가 그리워서 찾아온 그들을 우리는 왜 이토록 100% 반갑게 맞아들이지 못하고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기에 같은 형제끼리 서로 총을 겨누고 서로 의심하고 살아야 하는가.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문화’가 되어야 한다던 어느 영화감독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이동해 갈때 맨 몸으로 그냥 떠나곤 했다. 새로운 정착지에서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면 동거인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 동물을 잡아서 함께 나누어 먹었기에 그들은 많은 것이 필요없었다. 따라서 적이 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무한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오히려 인간은 욕망의 노예로 전락, 당장 필요하지 않는 것까지 쌓아두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욕망이 너와 나로 나누고, 적을 만들고, 결국은 이렇게 같은 형제끼리 총을 겨누고 살게 된 것아닌가.

인생의 필수품은 단순한 몇가지에 불과하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불필요한 것들을 욕망하며 산다.

나는 김정일에게 도대체 무얼 생각하며 사는지 묻고싶다.

인생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루에 5분씩이라도 명상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싶다.

그의 가슴속에 지렁이처럼 엉클어진 것들, 욕망의 보따리들을 단순 명쾌하게 정리해줄 묘안은 없을까?

저마다 먼저 달리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쌩쌩 달리는 차들을 단 한번의‘휘잇!’소리로 정리해주는 교통순경의 호르라기.

나는 그에게 성능좋은 호르라기 하나를 선물해 주고 싶다.

이런 욕망 저런 욕망, 그의 가슴속엔 진기명기를 뽐내는 해괴망칙한, 갖가지 욕망들이 시속 200-300km를 육박하며 달리고 있을 것이다.

하긴 어디 김정일 뿐이랴?

나의 가슴속에도 갖가지 욕망들이 엉클어져 있다.

우리 모두 호루라기 하나씩 지니고 살면 어떨까?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아마도 ‘바쁘다 바뻐’일것이다.

이 ‘바쁘다’는 ‘망’(忙)이라는 글자는 마음 심(心)과 망(亡)이라는 두글자가 합친것이다.

즉 마음을 잃은 상태를 말한다.

마음을 잃고 몸만 바쁘면 무얼하나? 그것은 곧 허깨비 라는 뜻.

때는 바야흐로 푸르름이 넘쳐나는 6월이다.

나무를 찾아 산으로 가면 파란색소 100%의 숲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향의품처럼넉넉하게, 혹은 옛 사진첩의 추억처럼 푸근하게 우리를 맞아주는 나무들의 숲.

바쁘고 지친 우리의 영혼에 슈베르트의 자장가라도 들려주듯 그 숲은 우리를 고즈넉하게 안아준다.

숲속의 포옹은 신선한 지혜로 우리를 씻어낼 것이다.

가슴 속에 호르라기 하나씩 품을줄 아는 사람.

그는 아마도 6월의 숲속에서 천진무구한 아기가 되어 순결한 포옹을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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