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치며

홧병에 관한 얘기를 쓴다는 것이 어쩌면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고, 나의 가족, 우리의 문화에 대해 스스로 비난하는것 같아서 창피하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홧병클리닉의 의사로서 집사람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혹은 직장에 있는 수련의들에게 이제껏 얼마나 홧병에 안 걸리도록 노력 했나를 생각한다면 더욱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들을 자신의 취미나 성격, 관심에 따라 자신의 뜻대로 살게 해주어야 하는데, 때로는 나의 태도나 성격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더욱이 홧병클리닉을 찾는 여러 환자들이“선생님의 사모님은 홧병에 걸릴염려가 없겠네요”라고 말하면, 집사람에게는 한편으로 더욱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화는 한의학에서는 일종의 스트레스이며, 또한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해석된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의 흐름에 이상이 생기는데, 이를 적절히 풀어줄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문제가 있던 기의 흐름도 다시 원활해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기는 흐름에 장애를 일으키고 때로는 어느 한 곳에 뭉치게 되는데, 특히 억울한 감정적인 스트레스인 경우 가슴 부위에 뭉치게된다.

이렇게 억울한 감정으로 인하여 뭉친 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슴이 답답한 신체 증상으로 바뀌고, 어느 순간 폭발하기까지 하는데, 그 폭발은 얼굴 위로 화가 올라가고,숨이 차며, 때로는 불안이나, 우울 등 홧병의 양태를 띄게 된다.

우리 사회·문화의 문제점이 개인 안에 응축

홧병이 문화관련 증후군에 속하는 것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은 지금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그러나 어느 주장이 옳던 간에 인간 세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많은 스트레스가 있고, 더군다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문화적인 관습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첨가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홧병은 때로 우리 사회와 문화의 문제점을 한 개인의 병으로 돌려버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위에 있는 홧병환자들이 정말 어렵게 살면서도,‘ 우리 집안을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우리 자녀를 위해, 우리 직장을 위해 참는다’라는 말은 결국은 이러한 문제가 사회화되기 이전에 자신이 모든 억울함을 안고 자신의 문제로 국한시키려는 뼈아픈 노력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의 가족이나 사회는 이러한 홧병환자의 희생하에서 무리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혼율이 적고, 교육열이 높으며, 효의 문화가 있다는 긍정적인 모습은 그 뒤에 홧병이라는 질환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사회의 안정이나 가정의 행복만을 위하여 개인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고 본다.

대이은 희생 강요의 악순환 타개가 중요

한 사람의 희생이 밖에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 자신이 썩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또한 결코 그 사람 하나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후손들에게 전달이 되기 때문에 희생은 새로운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 악순환을 밟게 되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안정도 중요하지만, 사람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모두가 하나의 숭고한 인격체로서 여겨질 때 우리의 미래는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홧병클리닉을 담당하고 있는 한 사람의 정신과 의사로서 홧병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의학으로 고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 더욱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홧병을 치료하는 어려움이 홧병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지나 않았나 스스로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홧병을 의사만의 노력으로 정복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독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것은 홧병을 소개하는 저자의 의도이기도 하다.

‘홧병클리닉’을 꾸준히 읽어준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마음속에 조그만한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한 감사에 대해 저자는 의학적인 노력을 더욱 경주할 것을 여러분께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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