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형산 왕룡사의 삼신각

10년전, 6월항쟁을 치루고 난 1980년대 말에 불교와 사회변혁과의 관계를 고뇌하며 진지하게 정진하던 한스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광주의 5월항쟁 추모기간 에는 자신의 선방에 민중미술 운동가들이 그린 걸개그림과 플랜카드를 걸어놓고 법회를 열었을 정도로 대중불교의 사회적 의미를 찾았고, 그러면서도 불경연구에 몰두하는 모범적인 학승(學僧)이었다. 지금도 교계의 내노라 하는 불교학자이다.

그 때 스님의 선방(禪房)에서 불교미술사에 대한 슬라이드 강연을 한 일이있다. 강연은 2부로 나누어, 1부에는 인도와 중국의 불교미술 흐름을, 2부에는 우리나라 불교미술사를 주제로 하였다. 1부는 무사히 넘어 갔으나, 2부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불자들 앞에서 학교에서 강의하던 식으로 하였으니 약간 부처님에 대한 불경스런 언어구사도 있었던 차에, 조선시대 불교미술에 들어와서 심각해진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발전에서 여성의 역할이 컸음을 얘기하며, 조선후기 춘화 중에서‘스님과 앞가르마에 개구리 첩지를 치장한 사대부가의 여인이 성교를 벌이고 그 모습을 문틈으로 훔쳐보는 상좌승을 담은 그림’을 보여주는 바람에 그리되었다.

사찰에 뿌리내린 성신앙적

제의행사

슬라이드를 상영하는 어두운 방안인데도 선명하게 눈에 띌 정도로 맨앞에 앉아 있던스님의 안색이 싹 가셨다. 그러고는 그가 이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무거운 어조로 “이제 그만 합시다”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토론해 봅시다”로 이어졌다. 불교 미술사 강연은 거기서 파장이 난것이다.

그 스님은 “승려가 등장한 춘화는 조선시대 불교를 무시했던 성리학 사회의 부산물이고, 민불(民佛)이나 성신앙적 유물과 같은 경우는 불교이념과 먼 미신적인 무속일 뿐이다”라는 주장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강연장에 온 청중 가운데 불신도들의 항의도 거셌다. 혼줄이 난 셈이었다. 종교나 불교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수 있겠구나 하며 그들의 야단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러나 지난호에 살펴본 관악산 삼막사의 경우처럼 성신앙적 조형물을 중심으로 지역민의 공동체 문화와 여인들의 상사(上寺) 풍습은 조선시대 불교문화의 큰 몫을 차지하였음 또한 분명하다. 그런 탓에 신라와 고려의 귀족불교보다 조선시대 불교가 폭넓게 대중을 포용할 수 있었고, 인간적인 냄새를 짙게 풍긴다. 조선시대 불상이나 불화, 부도등 불교유적에 그러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사찰 안에 승려든 불자 대중이든 사람들이 북적대면서 그들의 감성에 맞게 이루어낸 결과일 것이다. 결국 불가에서는 성신앙적 공동체가 승려들도 참여하는 종교적인 행사로까지 진전되었고, 그 좋은 사례가 속리산 법주사의 ‘송이(松耳)놀이’이다. 여기에서 ‘송이’는 송이버섯의 모양이 남근형태를 닮아서 빗댄 이름일것이다.

불신의 음기 누른 법주사

송이놀이

일제때 이능화 선생이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토대로 조사한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보은(報恩)의 속리산 마루턱에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가 있고, 그 신은 매년 시월 호랑이날(寅日)에 법주사(法住寺)에 강림(降臨)하기 때문에 절 사람들은 신을 맞이하기 위해 제(祭)를 베풀었다고 한다. 천왕은 신사에 45일을 머물렀다가 돌아간다고 하였다.

법주사(法住寺) 승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은 극히 음란(淫亂)했다 한다. 음력 섣달 그믐날인 제석일(除夕日)이면 온 사중(寺衆)이 모두 모여 제사를 행했는데, 목봉(木棒)으로 남근인 양경(陽莖)의 형용을 만들고 거기에 붉은 칠을 하여 그것을 들고 춤을 추며 신을 위안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찰에 재난이 생기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행사(行祀) 하였으나 근년에 비로소 혁파 되었다고한다.

자재천왕(自在天王)이란 불가(佛家)에서는 욕계마왕(欲界魔王)을 말한다. 부처가 성도(成道)할 때 이 마왕(魔王)이 방해 하였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모두 불서(佛書)에 실려있다. 법주사에서는 이 신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하며, 마력(魔力)이 있기 때문에 음희(淫戱)로 받들었다고 하나 실상은 신을 욕보이는 것이다.(李能和, <朝鮮巫俗考>(李在崑譯, 동문선, 1991)에서 문장을 약간 수정하여 재인용했음).

법주사의 이 송이놀이는 대자재천왕의 마력을 핑계삼은 행사이지만, 민간의 성신앙적 공동체 문화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또 이능화 선생이 비판적 시각으로 쓴 글이지만, 이 행사도 일제 시기에 들어서서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나무 남근으로 벌였던 송이놀이 제의는 당시 속리산 일대에서 살던 대중을 끌어들이는데 효과적 이었으리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마왕의 음력을 중화시키기 위해 깎은 남근은 민간에서 가정의 번창을 기원하는데도 중요한 용도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제 남근을 중심으로 한마을의 제의행사는 현재 삼척의 해신당(海神堂),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망개마을 풍어굿과 성황제등 동해안 일대에 남아 있다. 근래 사라졌지만 강릉 해랑당의 처녀귀신에게 목제 남근을 깎아 올리던 풍습도 그러한 사례이다. 또한 이런 관습은 중남부지방 농촌마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다산과 풍농, 악귀를 막는 벽사와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집안마당에 세운 볏가리대가 그것이다. 긴 대나무나 소나무 가지를 꽂고, 여기에는 솔가지, 짚, 오곡주머니, 빗자루 등과 함께 목제 남근을 깎아서 걸어 두기도 했다. 대개의 경우 길다란 목제 남근은 귀두가 땅을 향해 매달려 있어 땅의 음기에 양기를 떨어뜨리는 듯한 모습을 한다. 볏가리대는 현재 용인 민속촌에 재현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민속에 사용된 목제 남근의 실제 유물은 안압지에서 발견된 적이 있어, 그 전통이 신라때부터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목제 남근이 신물(神物)로서 활용되었던 풍습의 기록상 근거는 조선시대에 나타난다. 부근당(付根堂) 혹은 부군당(府君堂)이 그것인데, 궁중에서부터 중앙 부처는 물론 향리의 관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부근당의 제의행사가 진행되었던 것같다. 유교적 사회가 뿌리를 내리면서 그 행사가 음사(淫祠)로서 혁파된 기록이 <중종실록>에 등장해 있으나, 말기까지 민간은 물론 궁중에서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였다. 그 증거가 조선 말기 실학자인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기술 되어 있다.

음사(淫祠) 중 지금 서울의 각사(各司)에 신사가 있어 이를 부근당이라고 부른다. 잘못 부군당이라 이르기도 한다. 한 번 제사를 지낼 때는 누백금(累百金)의 돈이 든다. 부근이란 …나무로 음경을 많이 걸어 놓으니 음탕하기 짝이 없다. 목경(木莖)을 거는 의미는 사람의 뿌리가 신경(腎莖)이라는 점 때문이라 그리한 것이라고 한다. 외읍(外邑)에서도 그 같은 행사가 이루어졌다.

그처럼 유교적 이념 아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성기신앙을 음사의 미신으로 척결하려 노력하였으나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온 것을 보면 그만큼 사람이 사람을 낳는 성문제가 불교나 유교의 전통보다 인간사에 뿌리 깊게 자리잡힌 실상을 알게 해준다. 한편 우리네 무속신앙의 저력이기도 하다. 점술이나 풍수, 사주 같은 풍습이 현대 문명사회 내지 기독교 신앙이 크게 확산되어 있는 지금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현대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을 포함하여 거대한 산업도시로 발전한 지역에서도 성신앙적 생활현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수 있다. 그럼 먼저 포항지역을 가보겠다.

현대문명·기독신앙의 맹위

속에서도 무속은 번성

포항지역은 잘 알다시피 1970년대부터 포항종합제철이 들어서고 우리나라 중공업의 중심기지로 변모하여 거대 산업도시를 이룬 곳이다. 별신굿같은 풍어제와 마을동제가살아있던 동해남부의 주요 어항이면서 형산강을 끼고 전개된 연일(延日)평야의 너른 들녘이 조화를 이룬 영일만일대는 인근의 울산지역을 포함하여 그렇게 변하였다.

대규모 공장지대의 형성이 보여주는 대자본의 위세과 그에 상응하여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 닥친 노동운동의 열기, 그리고 공해 문제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의 전형적인산업도시지역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항지역에는 어찌 보면 산업문명과는 철저히 반대되고 비과학적이랄 수 있는 민간의 무속신앙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한 실상은 포항지역 사람들이 신령스런 산으로 모셔왔던형산(兄山)에 오르다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신앙처의 중심인 산정상의 큰바위도 그렇지만 산기슭의 바위나 암벽에는 갈라진 틈이나구멍, 오목한 공간마다 자연경관을 심하게 훼손시킬 정도로 가족의 이름을 써놓고 치성드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포항시의 남쪽을 가리는 형산은 해발 2백57미터로 낮은 바위산이다. 그러면서도 산정상에 올라보면, 동북쪽으로 펼쳐진 형산강을 낀 연일평야와 영일만 바다, 포항시가지와 제철소 공장지대가 한눈에 들어와 시원스레 전망이 좋으며, 그 영기(靈氣)를 곧바로 느낄 수 있다. 포항사람들은 그 높은 영험 때문인지, 역대 대통령을 배출했다는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와 곧잘 비교하곤 할 정도이다.

또한 형산은 형산강 건너 북쪽으로 낮게 솟은 제산(弟山)과 함께 형제산이 되며, 동남쪽의 옥녀산과 운제산으로 봉우리가 이어지면서 서연산맥(西緣山脈)을 이룬다. 산맥의 흐름은 신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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