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국가경영은 전략과 통합의 터전 위에서”

무르익은 봄볕이 초여름 햇살을 느끼게 하는 오후, 염곡동 이한동 고문의 집은 담을 휘감은 묵은 담쟁이 덩굴과 울 안에 가득한 수목들로 청량했다. 현관 옆에 이 고문이 손수 심었다는 대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고, 양재대로 너머의 울창한 청계산 자락이 뜰에서 한눈에 잡혔다. 모 케이블 TV 촬영 중인 이 고문을 대신하여 손님들을 맞기 위해 나온 부인 조남숙 여사의 한복 차림이 그 집 풍경과 썩 잘 어울려 보였다.

조여사가 특별취재팀을 안내한 곳은 그 대나무가 푸르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거실이었다.

- 지금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리들이 많습니다. 이 위기의 실체와 함께,난국을 헤쳐나갈 방법을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국가적인 위기의 실상을 보면 우선 경제가 비틀거리고, 안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가 이제는 불신을 넘어서 국민의 냉소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국가 경영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국가 위기의 상황은 내용면에서 고찰하면, 김영삼 대통령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국가 경영의 위기라고 먼저 생각합니다.

또 이 정권의 도덕성의 붕괴를 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최근에 한보 사태나 김현철씨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걱정하는게 두 가지지요. 우선 권력의 집중이 문제가 됩니다. 또 하나는 이 정권의 도덕성의 붕괴입니다. 이 나라의 기강과 질서를 지탱하고 있는 공사간의 권위체계가 와해돼 버렸어요. 이런것이 오늘 위기의 실상입니다.

따라서 우선 한보와 현철씨 문제를, 국민의 여러 가지 떠돌아 다니는 의혹을 상당한 정도 해소할 수 있는 그런 수준에서 법적인, 정치적인 마무리가 되야 할 겁니다. 그리고 대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돈과 정치와의 관계를 지금 이대로 가져가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이 고문께서는 5선의 관록을 가진 국회의원이시고, 집권여당의 가장 중요한 핵심 부서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이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사무총장을 지내셨고요. 그렇게 중요한 직책에 계셨다면 지금 말씀하시는 국가 경영의 위기 상황에 어떤 책임이 있는 것 아닐까요?

“지금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특히 여당은, 그 누구든 모두 오늘의 국가적 난국에 대해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 무책임한 회피의 수단으로 비쳐져서 문제가 될른지 모르겠습니다만, 대통령 중심제라는 권력 구조를 가진 헌법을 가진 나라에서는 정권이 당에 있는 게 아니라 대통령 자연인에게 있는 겁니다. 미국 보세요. 장관들을 전부 ‘세크러터리’, 비서라 그럽니다. 우리는 물론 내각제적 요소가 있어서 장관이란 말을 쓰지만요. 그래서 참모들이 대통령 보필을 살신성인의 자세로 잘해야 되는데, 그렇게 못한 측면도 있고요. 또 대통령께서도 더러 시행착오를 범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 경제가 몹시 어렵습니다.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지금 우리는 자칫 3류국가로 추락할 위험마저 안고 있습니다. 국제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고요. 전반적으로 우리 경제의 경쟁력이 악화된 직접적인 원인은‘고비용, 저효율구조’라고 봅니다. 기업의 자구 노력, 정부의 규제 완화, 국민들의 과소비 자제 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장기적으로는 기술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구조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

- 앞으로의 국가 경영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제는 국가 경영은 평상시적인 방법으로는 안된다고 봅니다. 세계 환경이 변하고 문명사적인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걸 극복해 나가려면 전략으로 대응해 나가야 합니다. 모든 국가 경영을 전략 개념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걸 국민이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된 힘으로 뒷받침해야 된다는 것이 소위 제 세계사의 주역 국가론이고 국가 전략론이고, 국민 통합의 정치입니다.”

- 우리나라가 세계사에 주역으로 나서야 한다, 그런 얘기를 하셨던데요?

“저는 우리 역사를 민족사관적인 입장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폴 케네디가 한국은 부존자원의 결핍을 높은 교육열로 극복한 개도국 중 가장 모범적인 예다, 그런 유명한 말을 했는데, 바로 그거죠. 우리는 머리와 노동력 하나로 만불의 나라를 만들었어요. 따라서 우리 민족이 다시 한번 결속을 해서 다음 세기에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 되고, 통일만 된다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분명히 지금 세계사를 끌고 나가고 있는 주역의 하나가 될 겁니다.”

- 통일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통일입니다. 자유, 평화, 민주의 3원칙이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합니다. 수많은 단계와 과정을 거쳐야 할 거예요. 지금은 남북간에 상호 협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상호교류와 협력을 증진해 나가려면 우선, 분단상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는데에 역점을 두고, 상대방을 서로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 공영해 가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는 접근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 신한국당 내의 다른 후보들과 비교해 볼 때 이고문께서는 정치경륜이 풍부하십니다. 그런데 대중적으로는 오히려 잘 알려져있지 않으시지요. 특히 여성계쪽으로요. 왜 그렇게 되셨습니까?

“맞습니다. 솔직히 제가 그동안 정치는 오래 했습니다만, 일을 통해서 정치 발전이나 국가 발전에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기여하려고 했지, 저를 대중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그런 의도적인 노력은 전혀 안 했어요. 굉장히 소홀했죠. 내 할 바를 최선을 다해 하면 되지 자기를 두드러지게 알리려고 노력하는게 쑥스럽고, 그런 느낌을 가지고 살아온 것 같아요.”

- 주위에서 아주 도덕적이고 인간적이라는 평을 받고 계시더군요. 상사로 모시기에 가장 편한분이었다는 평도 있고, 친화적이라고도 하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과 검은 돈의 관계란 참 불가분의 관계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한보 사태도 그렇고요. 그런데 돈문제로 구설수에 오르신 적이 한번도 없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그동안 봐 온 바에 의하면 대법원 산하의 법관들이 소위 청렴성이라 하는 점에서는 제일 두드러지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판소의 분위기가 그렇게 돼 있어요. 제가 아마 공직 생활을 법원에서 처음 시작해서 그런 게 몸에 배어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하지만, 저라고 뭐 그렇게 깨끗할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언제든지 모든 공사간의 처신이나 사물에 대한 판단에서 상식을 존중하고 순리에 따르겠다

하는 신념으로 지내왔습니다.”

- 이번 경선 후보자들 가운데 법대 출신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는 모든 분야에서 성장 일변도로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이제는 성장, 발전보다는 질서를 우선시해야 되는 그런 역사적인 시점이 아닌가, 그렇게 돼서 순리로 법과대학 나온 사람들이 국회에 많이 진출하는 현상이 생겼는데, 그런 어떤 시대적인 흐름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죠. 국회의원에 옛날에는 법조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여야간에 굉장히 많습니다. 서울

법대 출신만 60명이예요.”

- 질서 말씀하시니까 생각이 나는데요. 내무부 장관 하시던 시절에 경찰서 간판을 바꿔치기 하셨죠.

“오공 때 전두환 대통령이 ‘정의사회 구현’이라고 써붙였거든요. 그런데 다들 아시겠지만 정의란 게 뭔지 철학하는 사람도 모르잖아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배분적 정의, 평균적 정의 뭐 이렇게 정의를 내렸지만, 참 어려운 게 정의의 문제거든요. 그걸 구체적인 현실적인 정치의 하나의 목표로 내걸어 놓으니까 참 막연하지요.

‘국법 질서 확립’으로 바꿔라 오늘부터, 파출소도 전부 정의사회 구현이라고 된 걸 그것도 다 내리고 봉사, 민주경찰이니까 봉사를 하고, 그리고 질서야, 그랬더니 그게 지금까지 십년이 가까워오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어요.”

- 10년 동안 그대로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 정치가 세부적인 문제에는 무심하다는 얘기 아닐까요. 날마다 원칙론만 갖고 떠들지 국민들이 구체적인 삶에서 부딪치는 현실적인 문제들에는 세심한 배려가 없다는 거지요.

“한국 정치는 1970년 초부터 지금까지 말하자면 누가 대권을 잡느냐 하는 대권 경쟁만 했지 국민의 삶의 문제에 관해서 심각하게 국민과 함께 고민하는, 그러한 자세를 갖는 생활 정치라는 면에 너무 소홀했고,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 구호로만 외쳤지 실천적으로 정치가 뒷받침하지를 못했어요. 그런 데에도 정치 불신의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시작될 즈음에 손님들을 위한 다과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조여사는 이 고문맞은편 의자 팔걸이에 조용히앉아 있었다. 자리를 이 고문 옆자리로 옮겨 주십사 부탁드리자 조여사는 극구 사양하다가 마침내 옮겨 앉았다.)

- 앉으신 게 불편해 보이네요.

“(조여사)저는 지역에서 맨날 이렇게 구부리니까요 그게 버릇이 되서 그래요.”

- 듣기로는 처음에 정치 입문하실 때는 머리를 싸매고 반대하셨다고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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