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 먼저 발을 디딘 선배로 그리고 어머니로 지도하려 애써
육본 인사참모부, 논산 제2훈련소 여군교육대장 거쳐 여군 훈련소 소장으로

초창기 여군장교였던 만큼 나는 언제 어디로 부임되든지 처음 시작하는 일만 하였다. 때론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몰라 애를 먹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뜻깊고 보람있게 일을 한 셈이 되었다. 덕분에 가는 곳마다 표창장도 많이 받았다.

육본 인사 참모부에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부임하자 마자 여군소요판단에 대한 참모 연구서를 제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사실 그 당시로서는 육본 편제도 잘 몰랐고 인사 참모부가 무엇을 하는 곳 인지도 모르면서 가라니까 간것이었다. 그때는 발령장도 없이 모두 구두 명령을 받을 때였다. 부임을 하고 나서 비로소 그곳 업무를 찬찬히 훑어 보니 인사 참모부란 곳이 고급 장교들의 인사관리, 인사이동을 주관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알게 된 것이 여군장교들은 관급 부관실(현 부관감실)이라는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는데, 몇명 안되는 영관급 장교만을 취급하는 일이라면 그곳에서 내가 할일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를 보고 참모 연구를 하라니, 일의 돌아가는 전후를 모르는 나로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육본에 제출한 참모 연구서

여군부로 승격케한 밑거름

당시 육본 인사 참모부장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강 장군이셨는데 기합이 세다고 소문이 나 고급장교들도 벌벌 떠는 무서운 분이셨다. 그분은 또 명령불복을 가장 싫어하신다는 것이었다. 막막하긴 했지만 나는 곰곰 잘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소령계급을 단(당시 내 계급이 소령) 여군고급장교의 체통을 세워야 했고, 또 전 여군의 명예 때문에 라도 못한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여기 저기 수소문을 해서 “도대체 참모 연구란 무엇인가?” “어떠한 형식으로 해야하는가?” “자료는 무엇을 수집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들을 육하원칙에 따라 격식에 맞게 서류를 작성해서 수십장에 달하는 참모 연구서를 제출하였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애쓰긴 하였으나 막상 제출해 놓고 나니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정 장군님은 참모 대학을 1등으로 졸업하신 분이시니 내 부족한 부분이 속속 보여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 서류를 다 훑어보신 장군님의 말씀은 뜻밖의 것이었다.

“참 훌륭해. 남군 장교보다 낫다. 정말 수고했어.”

물론 흉내라도 냈다는 그 정신을 높이 평가해 주신 것이 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칭찬을 받고보니 마음이 날아갈 듯 하였다. 그 참모 연구서는 부관감실 여군과가 인사 참모부 여군부로 승격하는 뒷받침과 기초가 되었다.

특별 참모부에서 일반 참모부로 온 것 만으로도 성공적이었는데 나는 또다시 논산 제2훈련소 여군 교육대장으로 특명을 받고 가게 되었다. 그때는 휴전 이후라 여자 의용군을 모집할 수가 없어서 모병단이 전국 각 지구를 돌며 사람을 모집했는데, 제주도까지 가서 모집하였다.

당시의 여러가지 사건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두어가지 있다. 한가지는 지프차 배당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내게는 따로 배당된 차량이 없어서 출퇴근시‘G.M.C.’라고 부르던 군용 트럭의 앞자리에 앉아야만 하였다. 남군 장교들은 다 지프차를 타고 다니면서 홍일점인 여군 장교에게는 트럭을 타라고 하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관사 내에 계시는 참모의 지프차에 편승하고 출퇴근 하였더니 이번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나는‘이래서는 안되겠다’싶어 용기를 내어 훈련소 소장께 직접 면담 요청을 하였다.

“여군 소령의 대우를 이렇게 하셔도 되는 겁니까? 제 역할이 교육대장인데 배당된 차 한대가 없어 트럭을 타고 다녀야 하겠습니까?”

소장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내 불찰이다. 당장 지프차 한대를 여군 교육대장용으로 배차하겠다”고 하였다.

또 하나는 모범기를 탄 일이다. 제2훈련소 내에서는 각연대 직할 부대 참모부에게 1개월 암행 순찰과 행정 검열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암행순찰이니 만큼 우리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 언제 어디서 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지 신경을 쓴 일도 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우리 여군 교육대가 1등으로 뽑힌것이다. 순찰 반장이 여군 교육대가 1등이라고 보고하니 상부에서는 “설마… 정확하게 선발한 것인가?”하며 처음에는 인정을 안해 주더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사실임을 확인 하고나자 상을 크게 내리셨다. 여성은 항상 남성보다 뒤떨어진다는 선입견이 군에도 적용된 경우였다.

2군 여군과 초대과장으로 부임

여군정원, 여군규정 만들어

제2군 사령부로 발령을 받은 나는 또 구두 명령을 받고 2군 여군과를 창설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당시 전투부대인 1군 사령부는 원주에 있었고 후방부대인 2군 사령부는 대구에 있었는데 2군 사령관으로 계시던 분은 강문봉 장군이셨다. 여군과를 창설하여 여군중대 각 관구 사령부 내에 여군소대 논산 훈련소 여군 교환대를 설치하고 보니 남한 일대가 여군 과장의 지휘를 받게 되어 나는 자연 초대 과장인 동시에 참모로 지휘 통솔을 하게 되었다. 비로소 여군이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좋았으나 실상은 그때까지도 큰 변화가 없는 상태였다. 내가 육군 본부에 있을 때 손을 써서 타자병, 통신병들을 키워놓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기술 교육을 받고 돌아온 여군들에게는 타자기가 없으며, 교환병의 자리에는 여군 대신 여자 문관(여군이 아닌 여자직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할 일 없는 여군들은 또다시 차당번신세가 고작이었다.

‘이거 야단났다’싶은 생각이 든 나는 부랴부랴 2군 사령관에게“통신학교에서 교육 받은 군인을 왜 안쓰느냐”고 따졌다. 그리고는 여군들을 소집하여 정신교육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무슨 일을 하든 남군이나 여자 문관보다 낫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를 말끝마다 덧붙였다. 그래서 통신감의 입에서“여군 장교를 조심하시오. 까딱 잘못해서 걸리면 혼납니다”라는 말이 다 나왔다.

그렇게 한 연후에 2군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당시 공병우식 타자기 50대를 행정용으로 처음 구입하여 각 부처에 배당하고 여군 사병도 배치하였다. 그리고는 훈련 받은 여군들이 여자 문관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테스트를 하였다. 과연 정신과 실력으로 재무장한 여군이 인정을 받았다. 교환병도 그렇게 하여 실력으로써 당당히 후방지역 담당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전국에 여군 교환병을 배치해 놓고나니 전국 어디든 군이 있는 곳에 전화를 하면 여군 교환병과 연결이 되어 그 뿌듯함이 말로 다 못할 정도였다. 군대에서 필요해서 양성한 여군인만큼 적절한 책임을 주어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게 하는 것 이 당연한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추진한 일이었다. 또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또하나의 쾌거였기에 기쁨이 그만큼 더 컸다고도 할 수 있다.

2군에서 일하다보니 여군의 T/O 문제가 그때까지도 미결로 남아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여군도 자리잡힐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군 장병에 대한 정식 예산책정이 없다보니 모든 것이 남군들의 예산으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군부 차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여군 장병의 정식 T/O를 1천1백명(여군수 1천명 장교 1백명)으로 책정하고 여군 규정을 작성하여 통과시켰다. 또 병과장 인정문제 등 인사법도 통과시켰다.

여군 장교들로 참모 교대

여군 운전병 등장은 화제로

이후 1961년 5. 16혁명이 나던 해 나는 여군 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여군 훈련소에 가보니 G2 참모 외에는 모두가 남군 장교들이었다. 지금보다도 여권이 더 형편없을 때라 남자 참모들이 수행하는 것이 기분 나쁠 것은 없었다. 군대가 아니면 있을수 없는 일로 자랑스럽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여군 훈련소에는 운전병까지도 여군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또 여자 의용군을 모집할 때는 나라 사정이 그만큼 긴급할 때여서 그리 한 것인데 그 여군을 위하여 남군이 수고를 해야되고, 여군은 꽃처럼 보기만 하라는 것이 영 마땅치않았다. 그래서 차츰 참모들을 여군 장교로 교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박진학 대위 (당시 계급)를 인사장교 1번 타자로 넣었다. 이렇게 하여 반년 이내에 여군 장교들로 참모 교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운전병도 여군으로 등장 시켜서 서울시내에서 큰 화제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여성 운전기사들도 많은데 그들을 대할 때마다 옛일이 불쑥불쑥 떠오르곤 한다.

그런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이라도 먼저 군에 발을 디딘 선배로서 그들에게 따뜻한 어머니 역할을 해주고 싶었다. 모르는 것은 깨우쳐 주고 잘못하는 것은 시정해주면서 지도하려고 애썼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성경 말씀을 언제나 가슴 속 깊이 간직하면서 내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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