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K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찾아가도 될까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2년만에 만났다.

꽃이 만발한 우리회사 호숫가에서.

그동안 가끔 안부전화로 그가 우주항공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회사 그만 뒀습니다”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뭐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꼭 명퇴로 쫓겨난 것 같고.”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당퇴라고 하면 될걸 왜 고민하세요?”

“당퇴라뇨?”

“‘당당하게 퇴직했다’의 준말. 조퇴는 조기퇴직, 명퇴는 명예퇴직, 황퇴는 황당하게 퇴직,‘ 내가 우리나라 당퇴 제1호다’라고 자부심을 가지세요.”

그가 당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의 회사 전무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한 엘리트. 미국에서 연구기관에 재직중이던 그를 스카웃해 올 때 회사는 그에게 관사까지 제공했다. 그런데 그가 관악산에 올라가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회사는 당장에 그의 가족이 살던 관사를 비우라고 했다.

그것이 작년 12월 15일. 그 명령을 전달하고 수행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추운 겨울에 어디로 거처를 옮기라는 말인가. 오랜 미국생활에 아직 국내 적응을 잘하지 못하던 부인은 봄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K는 너무 순수한 사람이라 부인의 부탁을 야멸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버벅거릴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윗사람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무능력자로 판정이 난 것. 그는 순간 결심 했다고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의 나이 마흔.

그는 자기자신에게 말했다.

“그래, 새로 시작하자.”

그러나 주위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의 갈등은 시작되었다.

철없이 뛰노는 두 아이들을 볼 때 그의 갈등은 팽창되었다.

“나는 정말 잘 해 낼 수 있을까? 나는 정말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자기 진로에 물음표가 계속되고 결정할 수 없게되자 문득 내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객관적인 검증을 해달라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우선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그를 지배하고 있는 두가지 감정 중에서 하나를 과감하게 버리라고 말했다. 두가지 감정이란‘스타트와 라스트’‘끝과 시작’.

그 두개의 감정사이에서 그는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본다. 말하자면 스타트 상황에서도 라스트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로 분류가 되기도 하듯이.

K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끝’이라는 상황은 과감하게 떨쳐버려야 한다. 끝이 아니라 시작, 이렇게 고쳐 생각하고 희망속에 자신의 미래를 찾아야 한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너무 늦었다’라고 한탄하는이들에게젊음이란영원히없다.

지금 이순간, 오늘의 이 순간이 언제나 가장 젊은 시간이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공부.

다행히 광고에 대한 시간강사자리는 선배의 도움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새롭게 도전해야 하는 박사코스는 물론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줄 곳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려움이 그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살아갈수 있도록 도와 줄 어려움이기에 그것조차가 틀림없이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에게 말해요. 당신덕분에 이런‘체인지’가 가능하다. 나에게 5년만 투자해다오. 앞으로 남은 우리의 50년이 분명 달라질테니.”

초등학교 교사인 그의 아내 역시 비범한 여자가 분명하다.

“꼭 남자가 가정의 생존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나한테 미안해 하지 말고 공부해라. 내 힘껏 응원해 줄테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의 수명은 본래 30년이라고 한다. 조물주가 모든 동물들에게 똑같이 30년을 주었을때 노새가 말했다.

“나에게 30년은 너무 길어요.”

원숭이, 개도 마찬가지로 너무 길다고 하소연했다.

욕심장이 인간이 노새가 버린 18년, 개가 버린 12년, 원숭이가 버린 12년을 줏어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본래의 수명 30년이후는 내 의지, 내 각오대로 살아댜 한다. 노새처럼 죽도록 무거운 짐지고 일하다가 18년이 후딱 지나고, 개처럼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가 12년이 후딱 지나고, 원숭이처럼 남의 놀림감이 되어 살다가 12년이 후딱 지나가 버린다면 얼마나 허무 하겠는가.

“대학교수 정년는 65세, 앞으로 무려 25년이나 남았으니 얼마나 미래가 창창한가? 나는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난다.”

내 말에 그는 희망을 얻었다며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속에서 나는 미지의 신대륙을 향해 돛을 올린 젊은 선장의 모습을 떠올랐다.

물론 망망대해엔 거친 비바람이 불어 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배는 바람에 침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 오히려 그 바람의 힘으로 더욱 쾌속항 진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우리나라 당퇴 제1호,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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