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하다, 박대위는 여자가 아니라 여군이다`”
전화당번·차당번이 고작이었던 여군 후방지원군으로 전환시켜

 

영천 부관학교에서 보충교육으로 지휘관 교육을 받을 당시. 그때 박을희 선생은 남자장교보다 군번이 빨라 학생장을 했다.
영천 부관학교에서 보충교육으로 지휘관 교육을 받을 당시. 그때 박을희 선생은 남자장교보다 군번이 빨라 학생장을 했다.
  9.28수복 후 서울에 입성한 우리는 남산국민학교에 본부를 두고 여장을 풀었다. 무엇보다도 서울에 남아있던 남편과 시아버님의 소식이 궁금했던 나는 일각이 여삼추처럼 마음이 급하였다. 후암동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오히려 더디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다 집이 어느만큼 가까와지자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그 집에 살아있을까? 인민군들이 그냥 두지 않았을텐데…. 혹시 내가 나온 후에 피난을 간 것은 아닐까? 집에 없으면 어떻게 하나….”아직 피난 간 사람들이 올라오기 전이라 서울은 텅 비어 마치 사람도, 강아지도, 분수와 부지깽이까지도 모두가 잠들었다는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서울 위성지구 책임맡아 지프타고 주야 순찰

기적처럼 생과 사를 오가는 순간을 벌써 여러번 겪은 나였지만 남편과 시아버지가 그때까지 그 집에 살아계신 것은 정말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우리는 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게 상봉하였다. 그날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지낸 이야기를 하고 듣고 하며 밤을 지새웠다. 우리가 살면서 그리 인심을 잃지는 않았던지 인민군이 몇번씩이나 와서 사람을 찾았지만 동네 사람들이 서로 숨겨주고 막아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인과 환자만 있는데 오죽하면 피난도 못갔겠느냐”고 하면서 감싸주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양식은 어떻게 하셨어요?”

“왜 네가 전에 갖다놓은 양초 있지 않냐, 그걸 아주 요긴하게 잘 썼다. 그 양초로 불도 켜고 쌀도 바꾸어 먹었지.”

여자 청년단 때 쓰던 빨갛고 파란 양초 한상자를 가져다 놓은 것이 있었는데 전기가 안들어오는 상황에서 좋은 교환품 구실을 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남편도 시아버님도 헤어지기 전보다 상태가 더 나아보여 무척이나 다행스러웠다.

부산에서 여자 의용군을 모집하고 훈련시켜 근무처로 배치시킨 우리는 서울에서 다시 의용군을 모집하여 훈련에 들어갔다(부산에서 의용군 1기를 배출한 것이 9월 6일이라 지금도 이 날을 기려 여군 창설 기념일로 삼고 있다). 입성 후 나는 여군 훈련소장인 김현숙 대위를 모시고 중위로서 작전 교육 참모를 지냈다. 군대의 조직은 G1;인사, G2:정보, G3:작전교육, G4:군수 보급으로 구성됐는데 전쟁 중이라 참모 중에서도 G3인 작전교육 참모의 비중이 가장 컸다. 서울 위성지구 책임을 담당한 나는 주야로 순찰할 의무가 있어 지프차가 배당되었다. 그때 매일 밤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권총 한자루 지니지 않고 지프차를 타고서 광나루까지 야간 순찰을 나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전쟁 중이라 돌발사태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녀야 했을 때이니 만큼 웬만한 담력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그 여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단숨에 쳐올라갔던 아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또다시 후퇴 할 수 밖에 없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북풍이 휘몰아치고 강물이 얼어붙은 1월, 우리는 인천항에서 수송선인 L.S.T를 타고 또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군인가족 우대로 가족동반의 편안한(?) 피난길이었다. 부산항에 내린 우리는 육본이 있는 대구로 소집 되었다. 육본의 6중대장으로 근무하게 된 나는 부관감실에 가서 여군반을 담당하였다. 여자 의용군 1, 2기를 수료하고 육본에 배치된 여군 사병들의 인사관리 및 통솔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러나 막상 그 자리에 간 나는 어이없는 상황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훌륭한 정신으로 교육훈련을 받은 여군들이 하고 있는 일이라고는 전화당번, 차당번이 고작 이었던 것이다.

통신학교 부관학교 분산, 재교육 여군의 정당한 지위 확보

치열한 전쟁중에 부산에서 눈물겨운 교육훈련 과정을 수료하였고, 수료하는 날 부산 범일동에서 그 긴거리를 행진 하면서 국민들로부터 격려의 뜨거운 박수와 환영을 받고 외신보도에도 크게 다루어졌던 여자의용군이 아니었던가. 나 역시도 과로에 지친 몸으로 쓰러질듯 쓰러질듯 하면서도‘내가 쓰러지면 안되지’하는 마음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작업복에 무거운 권총과 물통을 허리에 달고 반장화 구두를 신고는 선두 지휘를 하였었다. 그때의 그 사진을 보면 지금도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들 정도이다. 우리는 그때 그 훈련을 연습이라 여기지 않고 진짜 부산까지 인민군이 공격해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철저하게 유감없이 훈련에 임하였었다. 그런 여군들에게 배당한 일이 고작 남군들의 심부름꾼 역할이라니, 막대한 국방예산을 사용하고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훈련시킨 보람이 없었다. 더구나 1기생은 교사 출신이 많고 의용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었으므로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해보겠다던 뜻에 어긋나자 실망하고 제대,귀가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선배인 나를 포함한 몇 사람들이 현실파악을 하고 보람 있는 후방지원군의 역할을 모색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에도 후방지원이 불성실했던 나라가 패배한 것은 잘 알려진 것으로, 후방지원의 필요성을 절감할 때이기도 하였다. 나는 우선 행정병, 통신병, 타자병, 교환병 등을 키울 기술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껴 당시 육참 총장이던 정일천 대장께 건의하여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리하여 통신학교, 부관학교를 분산하여 재교육을 시킨 후 교환병, 타자병, 통신병, 행정병이 배출되자 이로부터 T/O가 확보되고, 여군도 남군과 동등한 위치에서 책임을 완수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육본이 각국감실로 보직을 역임하면서 남군장교와 동등한 자격으로 내 위치를 갖고 책임완수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다음으로 내가 간 곳은 부산 병기학교의 교재담당관이었다. 당시 여군 15명을 데리고 철야작업을 하며 교재의 편집과 인쇄까지도 모두 맡아 하였다.

또 대구로 발령을 받아 경북 병사구 사령부에서 상이용사와 군정미망인들의 원호사업을 하였다. 그 당시의 명예제대자, 상이용사, 군경 유족들의 생활고와 정신적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부상입은 군인들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을 취학, 취직시키고, 남편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군납제품을 만들어 자립할 수 있게 주선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사자의 유골 안치에 전심을 다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군인들은 입대하면서 먼저 자신의 신상카드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넣어둔 봉투를 부착해둔다. 전사를 했는데도 유골을 못찾으면 대신 이것으로 장례를 지내기 위함이다. 부산으로 한꺼번에 모은 후 도별로 배치된 유골을 정리하는 작업은 정말 보통일이 아니었다. 일을 하다보면 유골이 든 상자는 묵직하고, 머리카락과 손톱만 든 상자는 가뿐하다. 그럴 때는 직접 가족이 아닌 우리의 마음도 아프곤 하였다.

보좌관직에 불만 상관과 담판하고 행정계장으로

유골정리가 끝나고 안치 장지까지 정한 후, 이번에는 그것을 운반하는 일이 큰 일이었다. 나는 생각 끝에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오빠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여자들도 다 함께 도와야 하지않겠는가’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몇 학교에 타진을 해보니 모두들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선 학부모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고, 학교 측의 반응도 부정적이었다. 그중에서 원화여중 교장선생님만이 승낙을 해주셔서 그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 교복을 단정히 입은 여학생들이 모두 마스크와 흰장갑을 착용하고 앞에 유골을 모시고는 대구역에서 봉헌하는 곳까지 시가행진을 하였다. 또 당시에는‘동원과’라는 곳에서 노무자를 동원, 징병하여 일을 시키는 것이 있었는데 주민등록이 없을 때라 동원되기 싫은 사람들은 돈을 슬쩍 찔러주고 빠지는 경우도많았다. 내가 이 책임을 맡았는데 워낙 부정의 소지가 많은 곳이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정보원이 몰래 뒤를 밟은 모양이었다. 후에 그 사람의 이야기가“박 중위는 3개월을 따라다녀도 콩나물 사먹을 돈 한번도 못 받더라”고 했다고 한다.

 

89년 가을에 교회사람들과 야외 나들이 간 박을희 선생.
89년 가을에 교회사람들과 야외 나들이 간 박을희 선생.
또 외국에서 오는 원호물자를 공정하게 배포하는 일도 지금 생각해도 잘해냈다고 자부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대위때는 재무감실의 행정과에 배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내 자리는 책상하나 없었고, 그냥‘보좌관’이라하여 남자 대위들 옆에서 서성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엄태섭 장군에게 쫓아갔다.

그러고는 당당하게“나라에서 돈들여 여군 훈련시킬 때는 남자들이 전방에 간 빈자리에서 일하게 하려고 한 것인데, 어느새 한국이 돈이 그렇게 많아져 보좌관을 쓸 정도가 되었습니까?”하고 따졌다. 그러자 엄장군은 깜짝 놀라며“대단하다. 박대위는 여자가 아니라 여군이다”며 행정 계장을 맡겼다. 나는 내가 한 말의 책임을 지기 위하여 정말 철저하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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