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피해자 자산조사
개정안 내년 초까지 무용지물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해선 ‘무조건’지원이 필요하다.

남편의 계속되는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지난해 12월 한 여성단체가 운영하는 쉼터에 입소한 A(42)씨는 생계비를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남편의 무자비한 폭력 때문에 다친 팔 치료도 받아야 하지만 의료비 역시 지원받지 못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A씨가 거주하던 다세대 주택이 남편과 공동명의로 돼 있어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을 피해 쉼터에 입소한 여성들의 자산을 조사해 생계비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현행 집행 방식 때문에 폭력 피해 여성들이 다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민주당 김상희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12인이 비수급권자들에게도 생계비나 아동교육 지원비 및 양육비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하 개정안)을 발의,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돼 내년 2월 4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르면 부양 의무자 기준과 재산·소득 기준을 조사해 적합한 가구에 대해 기초생활 보장 수급권(이하 수급권)을 부여하지만 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에 입소한 여성들의 경우 피해 여성들의 자산만을 조사해 수급권을 부여하게 돼 있다. 따라서 피해자 보호시설에 입소한 여성들 중 부양 의무자인 남편과 공동명의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등 일정 금액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수급권이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간 지자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피해자 보호시설에서 수급권을 신청하면 대부분 자산조사 없이 생계비 등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왔다. 그러던 것이 복지급여에 대한 부정 수급과 담당 공무원들의 횡령 사건이 발생하면서 2008년 말부터 자산 조사가 강화됐다. 이에 2009년 초부터 A씨처럼 자산 조사에 의해 수급권자로 지정받지 못하는 사례가 크게 증가하고, 일부 보호시설에서는 오갈 데 없는 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자산이 있는지를 물어 입소를 거부하거나 퇴소시키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정안을 마련하기는 했으나 일부 피해자 보호시설 관계자들은 “개정안에 새로 마련된 조항이 강제성을 띠지 않아 지원금 집행 부처인 여성가족부에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생계비 등을 지원받지 못할 수 있는 게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정안이 시행되는 내년 2월 4일 전까지는 비수급권자인 피해 여성을 지원할 수 있는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여성부는 지난해 비수급권자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획재정부에 4억9400만원을 신청했으나 전혀 예산에 반영되지 않아 생계비나 아동 양육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 보호시설 현장 관계자들과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사실상 정부가 위기상황에 처한 피해 여성을 보호·지원할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하는 한편, ‘전국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협의회’ 관계자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은 쉼터로 피신해 올 때 맨발로 오거나 잠옷차림으로 올 정도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보호시설로 온다. 자기 소유 재산이 있더라도 자산을 정리해 갖고 나올 여유가 없고 이후에 재산권 행사도 불가능한 게 현실”이라며 자산 조사를 해서 수급권자, 비수급권자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폭력 피해 여성들의 특수성을 반영해 예외 법령을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다.

정혜숙 서울시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역시 가정폭력과 같은 폭력 피해 여성들은 수급권과 상관없이 정부로부터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 교수는 “미국의 예만 봐도 우리나라처럼 기초수급권자의 개념으로 폭력 피해 여성들을 돕지 않는다. 정부나 시 차원에서 별도의 ‘긴급지원비’를 집행해 피해 여성들을 돕는다”며 우리나라 역시 별도의 지원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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