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세기는 온 세계가 부(富)의 불공평(不公平) 문제로 시비를 일삼던 시기였다. 지금도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부의 불공평에 대한 예민성과 해결의 당위성만큼은 이제 보편적 가치로 굳어져 있다. 칼 마르크스의 공헌은 바로 이러한 부의 불공평에 대한 인류의 예민성 수준을 지난 100년간 급격히 증진시켰다는 데 있다.

그 덕분에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선진국에 이른 나라일수록 부의 공평한 분배에 더 예민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불공평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국가정책에 반영하여 많이들 성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성공은 ‘부의 불공평’ 해소를 존재 이유로 내세웠던 공산권의 존립 기반을 흔들었고, 급기야 부의 분배철학으로 대립했던 이데올로기적 냉전이 막을 내린다.

부의 공평/불공평한 분배를 에워싼 문제는 이제 이데올로기적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의 유효성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철학과 체제가 부의 공평한 분배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정책과 법을 세우는가가 부의 공평한 분배를 실현시켜 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부의 불공평 문제는 정책의 문제가 되어 버렸으며, 실효성 있는 정책의 집행이 중요 관심사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 속의 불공평 문제는 좋은 정책을 만들어 노력만 하면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부의 분배에 관한 한 온 국민의 예민성이 높기 때문에 그렇게 기대할 수도 있다. 부의 불공평을 경계하고 견제하는 제어장치가 다양한 영역에 많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이제 새로운 불공평을 이야기 한다. 부의 불공평을 해소하기 위한 고개를 힘겹게 넘는 사이, 우리가 간과해온 새로운 불공평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바로 위험의 불공평한 분배다. 그간 재화의 분배에만 너무 신경을 써서 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어 가는데, 정작 위험은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불공평하게 배분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 기술, 지식, 제도는 복잡다단하게 발전하고 변화한다. 그런 만큼 그런 변화에서 오는 위험과 부작용도 커진다. 이 위험과 부작용의 폐해는, 부가 공평하게 배분되어야 하듯이, 이 위험과 폐해도 사람들 사이에 공평하게 최소화되고 배분되어야 옳다. 그러나 벡이 지적하듯이 그 위험은 공평하게 최소화되어 배분되고 있지 않다. 새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지식과 기술이 모자라는 사람이, 권력과 힘이 없는 사람이 더 위험에 처할 확률이 높고,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 그 예다.

교통수단과 제도의 발달이 이루어져서 모든 이가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지만, 거기에 따른 위험도 동시에 뒤따른다. 속도가 빨라지고, 시설과 구조가 복잡해지고 승하차 규칙이 까다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고도 많이 난다.

이 사고율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공평하지 않다. 위험이 특정 집단에 불공평하게 많이 배분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제도와 기술 및 문화에 적응이 느린 사람에게 위험이 과도하게 배분된다. 그런데도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과 예산과 감독은 이 특정 집단을 겨냥하기보다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 위험 확률이 높은 집단에는 더 많은 관심이 주어지는 것이 공평한 것 아닌가?

범죄도 마찬가지다. 특정 집단이 범죄를 당할 위험이 더 높다. 여성이 성범죄를 당할 확률이 남성에 비해 훨씬 높고, 빈 집이 많아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생활하기가 편한 곳엔 우범자가 많다. 통계상으로도 범죄가 많은 지역이 존재하며, 범죄 유형의 지역차도 존재한다. 따라서 범죄를 당할 확률이 모든 이에게 공평하지 않다. 범죄에의 위험이 불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험의 불공평한 배분에 예민성을 높여가야 한다. 어느 집단이 위험에 더 과도하게, 불공평하게 노출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정부와 국회와 대법원이 왜 존재하는가? 국민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위험으로부터 구하고, 그 위험이 특정 집단에 불공평하게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최근 극악한 범죄를 겪었다. 조두순 사건과 김길태 사건이 그것이다. 위험이 불공평하게 배분된 전형이다. 힘없는 순진한 소녀들이었고, 빈 집이 많은 주거 환경이었고, 적극적인 보살핌이 쉽지 않은 가정이었다. 이들이 처한 상황엔 위험이 불공평하게 모아져 있었다.

문제는 재발을 어떻게 막느냐 하는 것이다. 위험이 어린 소녀들에게 모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위험의 불공평성에 대한 예민성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국회도, 정부도, 대법원도 다른 일로 정신이 없다.

이 시기에 국회는 여야 일치로 연 170억원이 더 드는 보좌관 증원을 결정했고, 정부는 사교육 줄이기와 세종시 일로 바쁘며, 대법원은 여당의 대법원 구조조정에 발끈해 있다. 어린 소녀들이 저렇게 무참히 위험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자기 일로만 바쁘다. 도대체 그 소녀들은 누가 지켜주어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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