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제사는 지내지 마라"

호주제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섰던 고은광순(55·사진)씨가 이번에는 ‘내 제사 거부’의 깃발을 들었다. “호주제가 성차별의 하드웨어라면 제사는 가장 핵심적인 소프트웨어”라고 설명하는 그는 세계적으로 한국여성의 지위가 낮은 이유를 전근대적인 가정 문화에 있다고 지적한다.

“제사를 통해 남성은 집안의 주인이고, 혈통과 가문을 잇는 막중한 임무를 띠는 존재라고 끊임없이 의식화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도구일 뿐이죠. 여성이 문제제기라도 하면 ‘나쁜 년’이 되어 남편에게 치명 적인 명예훼손이 됩니다. 오래전에 외국 남성 봉사자가 한국의 여성단체 활동을 굉장히 부러워했는데, 명절에 여성활동가들이 모두 시댁으로 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그렇게 이율배반적으로 만드는 것이 가부장제죠.”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의 핵심 인물이기도 한 고은광순씨는 “전면적인 제사 거부가 어려우니 우선 내 제사 안 받기부터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제사를 조상을 기리는 아름다운 전통이나 가족 만남의 기회라고 반박하는 이들에게 불순한 제사의 기원과 비민주적인 성격을 설파한다.

“중국에서 3300년 전에 아버지와 형을 거역한 자가 자신의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 제사입니다. 조선시대에도 평민과 상민은 제사를 지낼 수 없었어요. 제사를 지내면 잡혀가서 곤장을 맞았습니다. 이처럼 비민주적이고 독선적인 문화가 제사입니다.”

남성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고, 여성들은 주방에서 나올 새도 없이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모여 있는 일반적인 우리의 명절 모습에 대해 고은광순씨는 “제사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소통이 안된다”며 새로운 명절 문화의 대안을 제시했다.

“죽은 자를 향해 일렬로 뒤통수 쳐다보면서 서 있지 말고, 코흘리개부터 노인들까지 1분 스피치 같은 걸 하면 어떨까요? 근황은 어떤지, 뭘 하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거죠. 가족 운동회나 야유회, 가족 연극 등을 하면서 상호 이해와 수평적인 소통을 이뤄가야 합니다. 살아있을 때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어놓으면 죽음이 그렇게 서럽지 않겠지요.”

덧붙여 그는 부계혈통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관혼상제, 특히 획일적인 결혼 문화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혼주를 부모로 설정해 결혼이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집안끼리의 결합이 되고 있다”며 “신랑 신부 스스로 혼주가 되어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결혼식을 만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고은광순씨는 “‘내 제사 거부 운동’으로 제사가 사라지면 천편일률적인 가족문화가 다양하게 변화하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데 더욱 관대해질 것”이라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2월 말에 출범할 예정인 사회 오피니언 리더 모임인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여는 여성 모임’을 통해서도 변화를 위한 그의 움직임은 계속될 것 같다.

‘내 제사 거부 운동’은 인터넷 다음 카페(http://cafe.daum.net/nomyjesa)를 통해서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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