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정 정무장관 시정 촉구
‘부인’ 대신 ‘배우자’로

한국의 여성정책 발전 속도는 국제사회도 놀랄 만큼 빠르다. 여성정책 발전에 유용한 기록 자료를 남기자는 바람에서 정무(제2)장관실 발족에서 현 여성부에 이르기까지 여성정책에 얽힌 에피소드를 ‘에피소드 여성정책史 ’를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주>

정무(제2)장관실이 발족된 지 1년쯤 지난 1989년 어느 날 총무처로부터 장관실에 청와대 만찬행사 초청장이 왔다. 국무위원들을 초청하니 ‘동부인 하시기 바란다’는 문안이 들어 있었다.

당시 여성으로선 유일한 국무위원이던 김영정 정무(제2)장관은 당장 총무처(지금의 행정안전부에 해당)에 항의해서 성차별적인 표현을 시정하라고 비서진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여성 장관에게 ‘동부인(同夫人)’이라니! 장관 비서관이던 나는 총무처 의전부서에 전화를 걸어 점잖게 시정을 요청했다. 총무처 담당자는 의아하다는 듯이 “그게 어째서 성차별 문제가 되는지요? 관례적·의례적 표현이니 행간을 읽어 알아서 남편과 같이 오시면 될 거 아니냐”고 반문해 왔다.

장관에게 들은 대로 보고했더니 노발대발했다. 김영정 장관이 누구인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을 역임한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학자 출신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 장관은 여성 장관은 그림자가 아니고 더 이상 투명인간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앞으로 정부의 공식 의전 초청장에는 ‘동부인’ 대신 ‘동배우자’로 해 달라고 총무처에 건의하도록 했다.

‘부인’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외무부 초청으로 장관이 공관장 등 외교관 부인들을 대상으로 외교안보연구원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다. 비서실에서 장관 동정보도 자료를 냈다. “김영정 정무2장관, 외교관 부인 대상 특강 예정” 언론에 난 기사를 본 장관은 나를 불렀다. 외교관 부인이 아니라 민간 여성 외교사절로 수정해서 다시 보도 자료를 내보내란다. 부인은 여성을 종속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라서 적절하지 못하니 외교관의 배우자라면 의당 민간 외교사절이라는 것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비서관이 작은 용어 하나에도 무신경하니 여성의식이 투철하지 못하다고 따끔하게 지적하면서 외무부 용어를 그대로 쓰지 말고 여성의 시각으로 각색하라고 일러준다.

그때만 해도 여성 외교관은 드물었으니 여성은 외교관이라기보다는 그 부인이라는 이미지가 더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외교통상부에서는 더 이상 부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이미 여성 대사도 3명이나 탄생했고 근래에는 많은 여성들이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으로 대거 진출하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리라. 외교안보연구원의 공관장 부인 대상 특별교육과정은 ‘공관장 배우자 교육’으로 어느새 바뀌었다.

그 후 언제부터인가 정부의 의전행사 초청장에는 ‘동부인하시기 바랍니다’라는 표현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대신 ‘배우자를 동반하시기 바랍니다’로 문안이 바뀌었다. 아쉽게도 김 장관은 그런 초청장을 받아보지 못하고 장관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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