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빙자간음죄 위헌판결은 시대 변화 따른 것
“보호받는 약자” 거부하는 여성들의 자기선언

오랜만에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듣는다.

파리 사교계의 꽃 코르티잔인 비올레타는 순정의 청년 알프레도의 열정적인 구애에 처음으로 애틋한 사랑을 느껴 모든 것을 버리고 동거를 하나 청년 아버지의 이기적인 만류로 그 곁을 떠나게 되고 그 과정을 모르는 남자의 모독 속에서 가련하게 죽어가는 카멜리아 여인의 이야기다. 전형적인 깨어진 사랑 때문에 관객이 눈시울을 적시는 것은 어쨌든 그들의 사랑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당초 순수하지 않은 사랑, 특히 결혼할 의사도 없이 혼인을 빙자하여 여자를 속여 간음한 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지난해 11월 26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혼인빙자간음죄’ 조항이 재판관 6(위헌) 대 3(합헌)의 의견으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남녀 간의 이성교제와 정교행위는 내밀한 사생활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국가가 최대한 간섭과 규제를 자제해야 한다. 혼전 성관계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로서 여성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인하는 것이 되므로 형법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다수의견을 채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헌결정은 2002년 헌법재판소의 합헌결정을 뒤집은 것으로 여성의 사회·경제적 위상과 혼전 성관계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획기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눈빛 연기가 일품인 유명한 한류스타가 헤어진 여자친구의 제소로 민사소송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유형의 사안에서 헌법재판소 결정 이전에는 형사고소까지 가능했지만 이제 형사고소는 할 수 없게 되었다.

1955년 한국판 카사노바로 유명한 박인수가 해군대위를 사칭하면서 수많은 부녀자를 농락한 시대상황과 2010년 여성의 사회진출과 참여가 활발해짐에 따라 여성의 경제능력과 발언권이 향상된 요즘의 상황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을 순수한 사랑이 아닌 쾌락의 대상으로 삼아 속임수로 성관계를 편취하는 반사회적 행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관심은 이번 헌재 결정을 바라보는 여성계의 입장이다. 법무부가 이 조항을 입법정책의 문제로 유보하고 위헌이 아니라고 한 반면, 여성부는 이 조항이 피해자를 부녀로 한정하여 남성에 대한 차별 소지가 있고 여성을 성적 의사결정의 자유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존재로 비하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헌재 결정 후 여성부와 대부분의 여성단체는 이 결정을 환영했다. 소수의 보수단체와 여성단체만이 성 개방 풍조와 부녀자의 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극소수의 입법례가 있을 뿐 실제 적용 사례도 흔치 않은 낡은 법조항에 매달려 보호를 받는 약자에 머물지 않겠다는 여성의 자기선언은 작은 실리보다 큰 명분을 찾겠다는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성은 스스로 지키는 당당한 여성의 선택은 자기 결정과 책임을 앞세우는 성숙한 시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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