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정책, 이제는 ‘스토리’를 만들 때
여성정책, 이제는 ‘스토리’를 만들 때
  • 김영옥 /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주류화연구실장
  • 승인 2009.12.24 09:54
  • 수정 2009-12-24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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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제도를 넘어 미시적인 삶의 질에 관심을
올해도 다 갔다. 여성정책을 연구하는 내 주변은 서브프라임이 몰고온 국제경제 위기와 보수실용 정부의 본격적인 집정이 형성한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에 직면하여 좌절하거나 우왕좌왕하면서 적잖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러나 얻은 것도 있다. 한편으로 뒤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10여 년간 여성정책은 쉼 없이 전진하느라 돌아볼 틈이 없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지난 성과를 평가하고 새 경작을 위해 땅을 고르는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올해 우연히 경험한 두 사건이 생각난다. 하나는 올 여름 태백지역에서 워크숍을 가진 후 주변을 산책하다가 만난 도룡이 연못이다.

석탄을 캐기 위해 판 갱이 무너지면서 생긴 웅덩이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연못이라고 한다. 연못 주변은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여서 그럭저럭 분위기가 있었는데, 안내 팻말을 읽는 순간 고단한 삶이 주는 애절함과 비애가 긴 여운을 남겼다.

탄광 매몰사고가 드물지 않은 광부의 아내들은 늘 남편의 무사함을 빌었는데, 이 연못에서 도룡이를 만나면 길조로 생각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연못인데 도룡이 스토리가 얹어지면서 수십 미터 아래 막장에서 까만 얼굴로 일하는 광부와 그 부인들의 삶이 떠올라 그 자리를 쉬 떠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바로 며칠 전 도쿄에서다. 이틀간의 짧은 일정에서도 틈을 내어 도쿄시내 반일 관광을 하였다. 사실 도쿄는 서울보다 좀 더 깨끗한 도시 정도로 생각하면 될 정도로 서울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 가이드는 막히는 긴자거리를 통과하면서 이 거리는 은행 등 금융기관이 밀집한 곳이고 저 거리는 백화점이 많은데, 일본의 3대 백화점은 미쓰비시 백화점… 식으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만들어갔다. 지금 방금 지나친 곳은 병원인데, 일본의 의료보험제도에서 종전까지 자가부담분이 20%였는데, 노령화로 인해 30%로 올랐고… 등 어느새 관광객들은 일본인의 삶에 빠져들면서 지루한 교통 혼잡을 잊고 있었다.

이쯤 되니 갈피를 잡지 못했던 여성정책의 미래가 여성정책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해답을 얻는다. 그동안 여성정책 담당부서를 만들고, 호주제를 폐지하고, 적극적 조치를 마련하는 등 인프라를 닦느라 참 바빴다. 이제 할 일은 콘텐츠와 스토리를 만들어 감동시키고 채워나가는 것이리라. 예컨대 한국이 지향하는 선진사회에서 여성의 참여와 역할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폭넓은 토론을 하고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다.

고령화 저출산의 위기 타파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여성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나, 정작 얼마나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진전되지 못했고 따라서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 조치가 취해지지 못했던 것이다. 또 남녀에게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소비가 아니라 산출을 낳는 투자이자 생산적 요소라는 스토리도 필요하다. 

이러한 여성정책 스토리들은 지금까지의 가시적인 법과 제도의 개선에서 나아가 문화와 의식의 변화, 일상적 관행의 변화 등 미시적인 삶의 질에 관심을 갖게 할 것이다.

법과 제도가 아무리 선진적이어도 이를 실행하는 실무자나 정책 수혜자들이 과거의 관행에 머물러 있다면 제도의 좋은 취지가 발현되지 못하고 사문화될 위험은 언제나 있다. 여성정책 스토리가 가져올 결과는 기대 이상이다. 단지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우리 사회 전반의 신뢰 수준을 높이고 사소한 불신으로 인한 불필요한 갈등이나 거래비용을 낮출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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