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엘 시스테마’ 꿈꾸는 피아니스트 서혜경
한국판 ‘엘 시스테마’ 꿈꾸는 피아니스트 서혜경
  • 이은경 / 여성신문 편집위원
  • 승인 2009.12.11 10:31
  • 수정 2009-12-11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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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음악이 선사하는 행복 ‘함께’ 누리고파
불우 청소년에 음악으로 ‘꿈’ 심어주고 영재 발굴하는 예술복지재단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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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웅 / 여성신문 사진기자 (asrai@womennews.co.kr)
오른팔 팔뚝까지 잘려 멜로디는 그 오른쪽 팔뚝으로, 화음은 왼손으로 치는 여고생과 함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제5번을 연탄곡으로 연주 중이다. 연주장을 가득 메운 청중 중엔 연주회는 물론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이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잡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여성재단 홍보대사 등으로 ‘재능 나눔’ 활동 펼쳐

지난해 연말 클래식 열풍을 일으켰던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한 장면을 현실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감동이 지난 4일 저녁 열린 서울시장애인체육대회 송년의 밤에서 재연됐다. 이들 장애인들에게 직접 레슨을 해주며 무대로 이끈 주역은 1980년 세계적 권위의 부조니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그것도 최연소로 우승을 거머쥐며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된 서혜경 경희대 음대 교수다(이후 83년 뮌헨 콩쿠르에서의 1위 없는 2위 수상· 카네기홀 선정 ‘올해의 3대 피아니스트’, 89년 도쿄 산토리 힐 선정 ‘현존하는 11인의 세계적 클래식 아티스트’ 등 화려한 이력을 보탰다). 재미있는 것은 그 자신도 ‘베토벤 바이러스’에 주요 카메오로 잠깐 출연했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을 도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단이 훌륭한 연주를 해낼 수 있게 도와주는 조력자로. 신기하게도 그 캐릭터는 지금 현재 그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하다.

그는 빈민가 아이들에게 미래의 꿈을 심어주는 베네수엘라의 무료 음악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의 한국판 대모를 꿈꾼다. 그래서 지난 10월 말 뜻있는 이들을 모아 자신의 재능 나눔을 중심으로 하는 ‘서혜경예술복지재단’을 출범시켜 올 연말까지 사단법인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재단의 주요 사업은 불우 청소년을 음악 교육으로 선도하고, 또 숨은 영재를 발굴해 지원하는 일이다. 유방암 환자와 어려운 형편의 피아니스트들을 돕기 위해 지난해 뉴욕에 ‘서혜경재단’을 설립한 데 이은 또 하나의 시도다. 이런 활동이 점차 주목을 받으면서 지난 11월 27일엔 효령상(문화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혜경을 읽는 또 하나의 코드는 유방암을 이겨낸 불굴의 음악 열정이다. 이후의 삶은 그 자신이 말하듯 “그동안 하나님, 부모님, 사회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갚아나가는” 여정이다. 한국유방건강재단 홍보대사, 세계수자원대책기구(The World Organization) 홍보대사 등 자신의 상징성이 공익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곳이면 어떤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아프리카 대륙 등 제3세계일수록 물의 오염이 심해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여성들 태반이 자궁경부암에 걸린다는 얘기를 듣고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이런 그가 2004년 ‘딸들에게 희망을’이란 슬로건이 무조건 좋아 한국여성재단(이사장 조형)의 홍보대사가 기꺼이 됐고, 그 인연으로 재단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나눔 음악회’의 주인공이 됐다. 신예 연주자 54명으로 구성된 사회적 기업 ‘필하모니아코리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서혜경은 확실히 살아있다” 재기 연주회 대성공

음악회 이틀 전인 7일 이화여대 음악관 김영의홀에서의 리허설을 거쳐 유방암 정기검진을 받는 서울대병원까지 그를 동행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연주회에서 ‘건반 위의 암사자’란 별칭을 들을 정도의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피아노 건반이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힘찬 터치를 과시했던 모습을 기억하는 기자로선 틈새시간을 내 병원 대합실이건 식당이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솔직한 언어를 쏟아내는 그의 면모가 의외였다.

“2006년 10월 교직원 신체검사에서 우연히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유방암이란 피아니스트를 두 번 죽이는 병이다. 3기 말기에다 더구나 오른쪽 가슴에서 발견된 암세포가 오른쪽 겨드랑이 림프선까지 전이돼 그 부분의 5분의 4 정도를 긁어내야 한다고 했다. 해외 의사들까지 포함해 7명 중 6명의 의사가 피아니스트 생활을 포기하라 했지만, 서울대 노동영 박사 단 한 분의 희망적인 말 한 마디에 매달려 수술을 감행했다. 다행히 신경과 근육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암세포만을 제거한 노 박사의 초정밀 수술이 기적적으로 성공했고, 여기에 나 또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적응해 수술 후 사흘 만에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처음 친 곡은 오펜바흐의 희가극 ‘호프만의 이야기’ 중 나오는 ‘뱃노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 사람의 경우 그 같은 수술을 받은 후엔 ‘숟가락 하나 들 힘도 없다’고 한다. 이후 1년 여간 33차례의 방사선 치료, 8번의 항암치료를 견뎌낸 후 2008년 1월 그 유명한 재기 연주회를 가졌다. 치료를 끝낸 지 석 달 만이었다. 그동안 심적 갈등은 극심했다. 그 자신 고백하듯 “항암치료 한 번에 머리카락이 몽땅 빠지고, 항암치료 두 번에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면역력이 떨어지고, 항암치료 세 번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수차례 견뎌낸 후였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테크닉을 어느 정도 이룬 줄 알았는데 그걸 잃는 줄 알고” 우울증이 걸릴 정도로 고심하던 시기였다.

연주회에서 그는 영화 ‘샤인’(Shine)에서 익히 봤듯이 피아니스트를 광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력을 지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 3번을 국내 최초로 동시 연주해냈다. 장장 80여 분에 걸쳐서.

그의 연주는 유방암 이후 강렬함은 좀 더 정제되고 섬세함은 한층 공교해졌다. 서혜경 자신은 어떨까.

“앞만 보고, 최고를 바라보며 달려온 인생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때론 완행열차를 타고 시골의 한 간이역에 내려 이름 없는 풀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하늘의 구름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다.”

그를 읽는 또 다른 코드, 어쩌면 그에게 가장 즐거울 주제는 바로 ‘모성’일 것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느껴졌다. 하루에도 간간이 뉴욕에 있는 아이들과 대화하느라 그 용도로만 사용할 휴대전화를 따로 마련할 정도니.

“하루 30~40분간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는 편이다. 네 의견은 어떠냐, 이런 식으로 살짝 영향력을 싣는다. ‘잔소리 없인 못 큰다’는 것이 지론인데, 이 잔소리는 또 다른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지겹지 않게 엄마와의 친밀감을 키워주는. 나처럼 해외연주니 해서 ‘뭉텅이’로 아이들에게서 사라져버리곤 하는 엄마에겐 더욱 그렇다.”

그는 30세를 기점으로 결혼했다. “세계를 제패하는 전설적 피아니스트”를 욕망했으나 너무나 아이가 갖고 싶어 모든 것을 중단하고 결혼했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세기의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가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지운 것을 못내 후회하곤 했다”는 얘기가 한창 귀에 와 박힐 때였다. 33세에 딸이 태어나자 직접 모유를 먹이며 3년여를 육아에 전념했다. 자연히 무대에 서는 기회와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딸아이 혼자로는 너무 외로우니 나와 똑같은 아이를 이번엔 아들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38세에 낳은 아들은 딸과 달리 “낳자마자 목에다 걸고” 한국으로 돌아와 육아와 커리어를 병행하는 길을 선택했다.

딸은 250여 년 전통의 명문 뉴욕 브롱스 과학고에 재학하며 대학 입학을 준비 중이고, 14세가 된 아들은 영재교육 과정에 있다. 피아노부터 전자기타까지 엄마를 닮은 끼로 안 건드려본 악기가 없을 정도지만, 지금은 미술에 빠져 있다고 한다.

150% 집중의 ‘올인’ 정신… 딸에게 “넌 대통령도 될 수 있어” 격려

특히, 태권도 유단자로 11세 때부터 태권도 사범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하면, 치열한 경합 속에 부회장에 당선돼 활기차게 학교를 누비는 딸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는 딸이 어릴 때부터 “넌 여성 대통령도 꿈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곤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 딸이 그 자신이 몸으로 체득한 ‘올인’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동지의식도 느낀다. “피나는 노력을 하면 천재 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올인’하면 초능력도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가 생각하는 ‘올인’은 무엇일까.

“아이들에게 ‘올인’의 중요성을 자주 얘기해준다. 우리 엄만 처음부터 머리 터지게 노력하는 것을 내게 가르쳐줬지만, 그 과정에서 내 자신감을 불필요하게 없앤 측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난 내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올인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다.

중국집에 가면 나오는 포춘 쿠키(fortune cookie)를 풀어 보면 ‘성공하려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내 경우에도 곡을 150% 이상 외워야 자신만만하고 신나게 연주할 수 있다. ‘100%’만으론 부족하다는 이 비법을 딸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는 “열정은 타고 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고도의 집중력이 중요하다. 본인이 집중 안 하는데 어떻게 청중을 몰입시킬 수 있나. 집중력과 카리스마를 위해 연습을 많이 하고 또 노력한다. 3분짜리 에튀드(etude)를 1000번씩, 1500번씩 연습하고서야 그 정수를 뽑아내 청중에게 전달한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는 ‘네가 바로 네 자신의 경쟁자’라고 말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고 자신을 이겨내야 참다운 예술가가 되는 법이다.”

지금은 칠순을 넘긴 그의 어머니 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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