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가리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습니다"
66년 연기생활, 세계 최다 작품 출연, 지금도 현역
“우주만큼 생각하고 별 떨기처럼 표현하라.”
그는 러시아의 연출가이자 배우였던 스타니슬랍스키의 격언을 나지막이 속삭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비로소 몸짓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연기의 기본 원칙이라 설명했다.
한국 근대연극의 살아있는 역사 원로배우 백성희(84). 1943년 극단 현대극장에 입단함과 동시에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이에 ‘봉선화’(함세덕 작·연출)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이후 나이와 국적을 불문한 숱한 무대에서, 지금까지 66년간을 열연해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환갑을 훌쩍 넘긴 세월만큼 세계 최다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400여 편의 작품을 공연해왔다.
배우로선 처음으로 비추미 여성대상 수상해 주목
지난해 봄엔 한국 연극 100주년 기념작 ‘백년언약’(오태석 작·연출)의 주역을 맡아 원로배우 장민호씨와 공연 2시간 여 동안 거의 무대를 떠나지 않는 혼신의 연기를 펼쳤고, 올 겨울엔 체호프의 작품 ‘세 자매’의 유모 안피샤 역으로 무대에 섰다. 이어서 12월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비극을 다룬 ‘둥둥 낙랑 둥’(최인훈 원작·최치림 연출)에서 비중 있는 조역을 맡았다. 내년 3월까지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작품만 해도 세 편에 이른다.
1950년 창단된 국립극단의 현존해 있는 유일한 창립 단원이자 현역 단원, 그리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그가 최근 삼성생명공익재단의 비추미 여성 대상의 수상자가 돼 또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 증진에 기여한 인물의 업적을 평가, 드높이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배우로선 그가 첫 수상자다. 각종 연극 상을 휩쓸다시피 받아온 그로선 배우가 아닌 ‘여성’ 롤 모델로 자신이 평가된 게 다소 낯설겠지만, 그가 일구어낸 연극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런 고정관념은 필요 없을 듯하다.
2시간 여에 걸친 원로배우와의 만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연극 소품이자 예술의 본질을 고민해보는 시간이었다. 그것도 속내를 이렇게 저렇게 끄집어내듯 편안하게. 인터뷰 내내 ‘운명’ ‘몰입’ ‘초월’이란 단어가 키워드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작품은 가려서 선택하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제 신조입니다. 그냥 연기할 뿐이죠. 연극배우는 그 자체가 자신이 무엇을 선택한다기보다 그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짐으로써 존재하는 거죠. 그게 바로 운명이죠. 내 경우를 봐도, 친구와 어딜 가다 우연히 연극을 보러 들어갔는데 문간에서 어떤 사람이 ‘이화자(당시 가명)씨죠?’ 하더니 며느리 역할을 할 배우가 어머니가 몹시 아파 안 나왔다며 개막 5분 전에 그의 대역을 시켰으니까요. ‘봉선화’에 일약 주역으로 캐스팅 돼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소녀’란 말도 들었지만, 그 정식 데뷔 이전 빅타가극단(반도가극단의 전신)에서 서항석 선생이 각색과 연출을 맡은 ‘심청전’의 뺑덕 어멈, ‘에밀레종’의 섭정왕후 등을 가명으로 이미 연기해오던 차였어요.”
극렬한 반대 무릅쓰고 ‘운명’적으로 연극 선택
그가 연극의 길에 들어서기까지의 지난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왜 그가 서슴없이 “연극은 내 운명”이라 하는지 십분 공감이 간다. 그는 부유한 3대 독자 집안에서 고대하던 첫째로 태어난 이후 내리 9명의 남동생 여동생이 생겨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해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에 유학 갔다 잠시 귀국한 외삼촌의 짐 속에서 우연히 (지금도 활동 중인,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다카라츠카 소녀가극단’ 팸플릿을 발견하고 이후 “소설로 한 권 쓸 만할 정도의 집안 반대”를 딛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실크 모자에 스틱을 딱 잡고 당당히 서있는 멋진 남자들에게 단박에 사로잡혔지만 외삼촌의 “야, 인마, 그거 남자가 아니라 여자야”란 말은 그보다 더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자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잔상은 마음속에 그 후에도 오래 오래 남아 여학교(동덕여고) 2학년 때 ‘빅타연구소 연구생’ 모집 광고를 보자마자 그 곳에 지원서를 넣어 본격적인 예비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런 것이 바로 ‘운명’ 아닐까.
“부친은 이미 개화기 때 일본인과 사업을 같이 할 정도로 깨인 분이었으나, 연극 자체는 너무 우스꽝스러웠던 거죠. 그러니, 마지막에 죽느냐 사느냐 밖에 남지 않더군요. 모친이 ‘자식 죽이지 말자’고 애원하자 그제야 아버지는 ‘너는 이제부터 내 딸 아니야. 너 맘대로 해. 네가 하겠다던 연극 광대, 그거 제대로 해야지 도중에 그만 두면 그땐 내 딸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야’라며 마지못해 승낙하셨죠.”
사실 부친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할머니의 “이 사람아, 그게 나쁜 일 아니래. 심청이 하는 거래”란 말이었다. 예전 할머니가 “어순(본명)아, 이리 온. 심청이 해봐” 하면 심청이 흉내를 곧잘 내곤 하던 그는 후에 할머니가 “연극이 뭐 하는 거냐”라고 묻자 “심청이 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한다. 심청이가 주는 감동을 익히 잘 알던 할머니야말로 본능적으로 예술의 본질에 가까이 가 있었던 것 아닐까.
“지금 생각해도 난 자아가 무척 강한 사람인 것 같아요. 이토록 하고 싶은 연극을 하게 됐으니 억지로라도 행복해야지, 그게 명분이었죠. 아파도, 혹 맘에 내키지 않는 배역이 와도 ‘아니지, 아버지가 어떻게 허락한 연극인데’라고 생각하곤 했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싫증 한 번 안 냈어요. 이 역 끝나면 다음엔 무슨 역일까 기다리곤 했죠. 미치광이처럼 무대 위에서, 국립극장 안에서 살아왔어요.”
올 6월 ‘명동예술극장’ 이름으로 재개관된 예전 명동국립극장은 그에겐 그리움이자 아픔이다. 34년 전 극장이 명동에서 물러나 현재의 장충동 국립극장으로 터를 옮긴 것을 한국 연극사의 후퇴로 보기 때문이다. 이후 진정 좋은 연극이 안 나왔다는 것. 반면 6·25 당시 마산 부산 등지를 순회공연 하던 시절은 어려웠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사람들이 심적으로 불안하니 전쟁 통에도 사람들 스스로 군중이 모인 곳을 찾나 봐요. 당시 연극을 하루 세 번 공연해 아침 11시 공연이 있었을 정도니. 이해랑 선생의 유명한 일화가 있죠. 밤에 잘 때 칫솔질 등 최소한의 것만 하고 분장도 안 지우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대로 무대에 나오곤 하셨죠. ‘내일 아침에 공연할 텐데’ 하시면서요.”
현장 감흥 없는 영화엔 안 끌려
그는 ‘나이 없는’ 배우로 유명하다. 1982년 그의 나이 50대 중반을 넘어 ‘장화 신은 고양이’(루트비히 티이크 작·오태석 연출)의 17세 공주 역을 했으니. 오죽하면 고등학생이었던 손녀가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할머니가 젊은 역, 나이 든 역 맡는 것을 무대에선 별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봤는데, 집에 와 보니 ‘우리 할머니가 오십이 넘었구나’ 생각이 들더라”고 했을까. 그 역시 천연덕스럽다. “나 자신 나이에 무감각한데, 다른 사람이 어찌 나이를 느끼겠느냐”며.
“연극은 나이와 전혀 상관없어요. 그 역에 ‘분’해 나가는 거죠. 연극이란 ‘현재의 나’를 지우는 작업이죠. 그래서 그런지 공연 중엔 모르다가도 막 내리고 몸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멍든 곳을 발견하곤 해요.”
그에 따르면, 연극은 정말 남는 게 하나도 없다. 바로 현장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연극이라도 필름으로 찍어놓은 연극을 그는 연극으로 안 친다.
“배우는 ‘배우술’을 익혀야 돼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도 관객을 슬프게 이끌어 가는 것이 바로 배우술이죠. 일본에 ‘배우 운다, 관객 웃는다’란 격언이 있는데, 이처럼 배우와 관객이 따로 놀면 안 되죠. TV나 영화처럼 기술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배우는 온 몸으로 벌거벗고 무대 위에 서서 관객과 맞서 그들을 흡인해내고 공감을 이끌어내야 해요. 연극배우란 바로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죠.”
그는 솔직히 말한다. 자신이 영화를 기피하는 이유는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연극에 온 순정을 다 바쳐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현장에서 같이 감동을 나누고 매일 축제처럼 치러내는 연극에 비해 영화엔 그런 힘이 없다, 그래서 성이 안 찬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일전 영화 촬영에 임했을 때(그는 2001년 개봉된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남자 주인공의 할머니로 치매에 걸린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해냈다) “밤새 연구해 촬영장에 가서 울고 웃는 표정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도 카메라의 시선은 그런 나를 포착하지 않고 상대 배우에게로 넘어가”는 기막힌 경험을 이미 했다. 거기에 편집과 녹음이 다시 가미된 작품을 시사회장에서 마주치는 당혹스러움이라니. 그래서 그는 영화는 ‘감독예술’이라 단언한다.
“원로배우는 나하고 장민호 선생밖에 안 남았지만, 국립극장 배우란 ‘국가가 공인한 최상의 배우’를 뜻하죠. 그런데, 우리나라엔 이에 대한 인식이 너무 없어요. 국립극단에도 국립극장이란 장소만 줬을 뿐 지원이 별로 없어요.
1680년 루이 14세가 세운 세계 최초의 국립극단 ‘코메디 프랑세즈’를 보세요. 루이 14세는 코메디 프랑세즈에만 파리 공연 독점권을 줘서 최상의 연극을 공연하게 했고, 전 유럽이 이를 보기 위해 파리로 몰려오게 만듦으로써 파리를 예술의 도시로 만들었잖아요. 지금도 서양 연극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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