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아들에게 사회공헌 보여준 스크랜턴 여사 본 받아야
자녀에게 희생하기보다는 주체적 삶 가르쳐야

한국이 지난 반세기 기적 같은 발전을 이룬 데는 한국 어머니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열의와 가족을 위한 헌신이 큰 몫을 하였다고 믿는다. 어머니들은 오로지 가정과 자식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였고, 오십이 넘은 우리 세대는 그러한 어머니의 삶에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아니다. 돈을 벌든 사회봉사를 하든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멋있게 사는 모습을 존경한다. 자녀들이란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좋아하면서도, 어머니를 한 인간으로 존경하고 존중하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이다.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들은 그래서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매우 섭섭해 한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많이 활약하고 삶도 길어진 세상에서, 어머니는 자녀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보는 창의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아이에게 집착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 가장 멋있는 삶을 만들어 낸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홀어머니와 외아들의 이야기인데 10월 여성신문과 여러 신문에 게재된 바 있다.

1885년 미국 감리교회에서 파송된 초대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은 그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조선 땅에 왔다. 메리는 40세에 남편을 잃었고 당시 아들은 15살이었다. 메리는 대학을 못 갔지만 아들은 예일대학과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나와 의사가 되었다. 교육 잘 받은 아들의 효도를 받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었건만, 선교사 제의를 받은 아들 부부와 52세가 된 어머니는 당시 가난과 무지의 나라 조선을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선택하였다. 100년 전 미국 여성의 평균수명이 49세였으니, 메리는 노후를 선교 사업에 바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25년간 한국에서 살며 한국의 초대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웠고, 그 외에도 여성들을 위한 전도부인 양성소, 지방학교, 병원, 교회 등을 시작하여 수만의 여성들을 교육시켰다.

아들이 동대문에서 병원을 시작하자 어머니도 그 지역에서 여성선교를 하였고, 남대문 상동 쪽을 개척하여 민중을 위한 의료사업을 하자 그의 어려움에 동참하기 위해 어머니도 이사를 하여 그의 일을 도왔다. 어머니와 아들은 매사에 동반자요, 동역자요, 파트너였다. 그들의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헌신으로 한국 사람들은 큰 은혜를 입었다. 한국의 여성 교육은 이러한 어머니상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120여 년 전의 일이지만 메리 스크랜턴은 오늘날 어머니들에게 훌륭한 모델을 제시해주었다고 본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 옆에 늘 있으면서 그가 세상을 위해 가장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동반자가 되어 주었고, 자신의 삶도 새롭게 개척하면서 아들의 협조를 얻었다. 그의 노후는 그래서 외롭지 않았고 섭섭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핏 보면 메리 스크랜턴은 고향 땅을 떠나 가난한 조선에서 매우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보이지만, 그 모자는 아마 조금도 후회 없는 가장 보람되고 멋있는 삶을 개척해 나갔다고 생각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자식에 대한 집착이 되기가 쉽다. 자식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이 사회를 위해 공헌하도록 키우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이다. 역사에 훌륭한 어머니들은 다 그런 어머니였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어도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였다는 자부심이 있을 때 위로를 받는다. 내 자식이 죽기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들이 이 세상과 사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때, 아마 부모는 가장 흐뭇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런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요즘 자식을 위한다며 대학교까지 찾아가서, 아니 직장까지 찾아가서 참견하는 어머니,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자식에게, 또 주위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는 어머니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어머니들은 오늘에 합당한 멋있는 어머니의 모델을 많이 창출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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