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우리는 다문화에 대한 과감한 접촉이 한 개인의 미래 사회에 대한 지평을 넓힌다는 주제를 이야기했다. 오늘은 영어에 대한 일부 민족주의적 시각과 특정한 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시각을 경계한다는 주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물론 영어는 영국을 기반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 언어다. 엄밀히 말해, 영국의 과거 제국주의 부산물이 오늘날 국제어로서의 위상을 얻었으니 역사적 패러독스인 것만은 틀림없다. 역사를 통해 교훈적 현재와 미래를 조명한다는 거창한 목적을 두고 본다면 인간의 바른생활 규칙과 현실 상황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제 영어는 더 이상 특정 국가의 언어로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문화적 종속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자녀들에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권하는 두 개의 행동 수칙 사이에는 그 격차(discrepancy)를 메워줄 무엇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성의 견지라는 바탕 위에서 영어를 대하고 공부해야 한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기독교 문명에 편향되고 이슬람 문명을 몰이해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문화적 제국주의의 총아를 양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한 편협을 조장하는 방식이라면 차라리 다언어 통번역기를 발명해서 보급하는 것이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영어가 그 알파벳 활자로 표현하는 내용이 당연히 그것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문화권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전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다고 한국어, 아랍어, 불어, 베트남어 등이 궁극적으로 위축을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완전하고 절대적인 쇄국론이 다시 등장해도 할 수 없다.

청소년기에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도 바로 이곳이다. 영어는 국제어로서 배우고 국제적 안목을 키우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문화적 편향을 낳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다문화에 대한 접촉이라고 규정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영어를 공부하기 좋은 환경은 물론 영어가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는 장소, 즉 영어권이지만 그곳에서 배워야 할 것은 세계사, 세계지리, 세계문화, 지구과학 등의 과목이지 셰익스피어와 영국사, 너대니얼 호손과 미국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눈부신 문명사는 분명히 영어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목하 기계문명의 부조리 하에서 인간의 영혼을 구제하는 다양한 치유법들은 그것이 종교적이든 주술적이든 간에 국제어 능력과 무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소통을 위해서 시대적·사회적 경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지 주류의 득세에 편입하기 위해 영어를 배워서는 안 된다. 영어는 인류의 의사소통 문명사에서 본다면 여전히 아주 짧고 미래가 불투명한 수단일 뿐이다. 영어가 국제어로서 득세하는 시대에 순응한다는 것을 굳이 반박하지는 않지만 의사소통의 진정한 의미는 ‘너’와 ‘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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