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폭력·살인…인간의 심연 관통
여성폭력·살인…인간의 심연 관통
  • 조승미 /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09.10.16 14:50
  • 수정 2009-10-16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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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후보 조이스 캐럴 오츠 신간
섬세·독특·대담한 미스터리 중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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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나지막이 울린다. 전화발신 창에는 ‘확인 불가’라 표시된다. 여자는 수화기를 집어든다. 전화 속 남자는 여자의 남편이 괜찮고 평판 좋은 사람인가, 지금 혼자 있는지 따위를 물으며 희롱한다. 여자는 수화기 저편의 남자가 누구일까 진땀을 흘린다. 혹시 자신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드는 자기 남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신은 절대로 날 배반하지 않을 거지. 그렇지?”라는 속삭임. 자기도 모르게 전화 저편에 “친구가 필요하다”고 속내를 말해 버린 그 날, 남편은 어느 날보다 더 일찍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의 차 전조등이 번쩍이는 것을 보며, 여자는 진심을 말한 대가가 죽음일 수도 있을 거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다. 여자는 총을 보관하는 벽장을 더듬기 시작한다.

(‘여자라는 종족’ 중 ‘하늘에 맹세코’ 줄거리)

아무도 안전하지 않은 세계. 그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혹은 살아남아야 하는 개체로서 여자라는 종족, 한계에 내몰린 인생들을 지난 40년 동안 그려내 온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여성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71)의 여성 미스터리 중단편집 ‘여자라는 종족’(The Female of the Species)이 국내에서 번역돼 출간됐다.

총 9편으로 구성된 중단편에는 가정폭력과 데이트 폭력, 스토킹, 성매매 착취, 근친 성폭력 등 여성을 둘러싼 여러 형태의 폭력을 은유와 수사로 드러냈다. 치밀한 플롯 속에서 여성들은 아내, 정부, 애인, 어머니, 딸 등 각기 다른 사회적·관계적 위치로 이런 폭력의 세계와 마주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등장인물과 독자 모두에게 끊임없이 지속적인 긴장감을 불어넣는 전개 방식과 폭력에 접해 여성이 느끼는 심리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기존의 미스터리물과 달리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은 더 이상 폭력의 일방적인 희생자나 가련하고 불쌍한 피해자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강인해지거나 사악한 악녀 살인마로 뜬금없이 돌변하지도 않는다. 전형적인 플롯 전개와 캐릭터 설정은 없다.

감당할 수 없이 힘든 폭력을 직접 응징하려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인에 나서거나 혹은 살인을 통한 해결을 고민하는 여성들, 그 언저리에서 이를 지켜보고 감당하느라 큰 심리적 충격을 입은 여성들의 모습을 잘 포착했다. 용기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며, 슬프기도 하다. 이렇게 여성들은 매우 사실적인 ‘여자라는 종족’으로 묘사된다. 전형적 틀을 벗어난 작가 특유의 리얼리티와 상상력이 대담하고 독특하다.

또, 여성에 대한 폭력을 쉽게 단정해 규정짓고 고발하려 하지도 않는다. 폭력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된다.

자신을 스토킹 하는 어리석은 남자를 이용해 자신을 때리는 남자친구를 살해할 것을 획책하는 여자(‘분노의 천사’), 가정폭력을 심하게 당했던 어머니가 가해자 아버지를 산 채로 불태워버린 후 침묵을 강요하자 토끼 울음소리 환청을 듣기 시작한 딸(‘떠나지 않는 울음소리’), 남편을 죽이고 유산을 갖자고 꾀며 협박하는 정부를 이제 죽이려고 준비하는 여자(‘허기’), 나이팅게일처럼 천사로 보이지만 끊임없이 지쳐만 가는 돌봄노동 속에 생명이 아닌 죽음을 선물하는 여자(‘자비의 천사’) 등에서 살인하는 여성을 모티브로 한 작가의 폭력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2004년 이래 올해까지 영미권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인 조이스 캐럴 오츠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명료하고 정교한 문장으로 평단과 독자 모두의 찬사를 받아왔다. 1964년 등단 이래 100여 권의 책을 펴낸 다작 작가로 토니 모리슨 등과 어깨를 견주는 미국 문학의 산 증인으로 알려졌다.

‘여자라는 종족’에 담긴 9개의 작품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작가가 앨러리 퀸 매거진, 알프레드 히치콕 매거진 등 저명한 미스터리 소설 잡지에 실은 것을 엮었다. 폭력에 대한 은유와 수사가 마냥 편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책을 열면 도저히 닫기 어려운 기묘한 끌림이 있다. ‘마녀의 마법’ 같다는 평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혼한 부모에게 방치된 채 ‘계집애가 만날 심통이나 부린다’고 엄마와 새 아빠에게 매 맞던 여자 아이는 남동생을 던지려 옥상에 오른다.(‘밴시, 죽음을 알리는 요정’) 의붓 아빠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여자아이 ‘인형’은 자신을 탐하는 남성들에게 가차 없이 면도칼을 휘두른다.(‘인형, 미시시피 로맨스’) 돈으로 자신의 부재를 달래는 부자 남편을 둔 여자는 관계의 공허함을 쇼핑을 하며 위세를 부리는 것으로 채우다 살해당한다. 죽음을 앞둔 그녀는 자신처럼 희생당한 남편의 전 정부를 본다.(‘마네킹이 되고 만 여자’) 

‘여자라는 종족’ 중 가장 가슴 끝이 아련해지는 작품은 ‘용서한다고 말해줄래?’이다. 시간을 역순으로 구성한 수작이다. 어렸을 적 비밀을 알고 있다고 위협하며 불륜관계를 유지하려 한 정부를 계획적으로 죽인 여자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일부러 자신의 어린 딸에게 범행 현장을 보게 한다. 딸은 충격으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세월이 지나 이제 늙은 어머니는 딸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쓴다. 어른이 된 딸은 어머니가 폭력을 입기도 했고 동시에 자신에게 쓰라린 상처를 남겨준 그 범행 현장을 오래간만에 다시 찾는다. 딸은 넋을 잃는다.

딸은 “울고 있었던 걸까.” 어머니의 비밀은 얼마나 크고 깊을까. 딸은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을까. 



여자라는 종족 (조이스 캐럴 오츠/ 예담/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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