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관광지형도 바꾸고 있는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지난 9월 18일 서귀포에서 만난 한 택시기사는 ‘택시 타는 이들도 더러 있느냐’는 올레꾼의 물음에 진정어린 어투로 말했다. 그러곤 자연 속에서 차 맛을 음미해 보라며 6코스 끄트머리에 있는 찻집을 일러줬다.

택시기사뿐 아니다. 코스 중간에서 파전과 순다리, 우미를 팔며 올레꾼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할머니도 “이사장님 덕에 장사가 잘 돼 살만하다”고 말한다.

처음, 고향 제주에 걷는 길을 내겠노라고 했을 때 뜻밖에도 반대했던 이들이 택시기사들이었다. ‘걷는 이들이 택시를 타겠느냐?’며 외면했던 것. 하지만 요즘은 택시기사들로부터 제주 경기를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가장 많이 듣는다.

그녀가 제주 올레를 만들어 알리고 올레꾼들이 몰려오면서 30여 년간 이어져온 제주 관광의 패턴이 바뀌었다. 관광버스를 이용, 눈요기 포인트에서만 잠시 하차하여 부리나케 둘러보고 사진 몇 컷 찍곤 하는 단체 관광객들 못지않게 쉬엄쉬엄 걸으며 제주의 요모조모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관광지 주변의 대형식당에서나 누리던 ‘관광특수’를 골목길의 작은 상점, 식당, 시장상인, 택시기사들까지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경기침체, 신종 플루로 인해 수학여행단과 단체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신혼여행 커플이나 가족, 소그룹 등 개별 관광객 수가 현저히 증가해 제주엔 올 들어 9월 말 현재 483만5000여 명이 다녀갔다. 지난해보다 52만여 명이 증가한 수치다. 11월이면 목표했던 관광객 600만 명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된다.

올레꾼에 대한 대략의 집계도 지난해엔 3만여 명이던 것이 올해는 8월 말 12만 명으로 추산된다. 필자만 하더라도 그동안 2~3년에 한 번 가던 제주를 올해는 순전히 올레 걷기를 위해 두 차례 다녀왔다. 

처음에 반대하던 택시기사들 "제주를 바꿔놓았다"며 감탄

‘올레’는 제주 토박이말로 집 앞마당을 지나 마을의 큰길에 이르는 작은 골목길을 뜻한다.

서귀포에서 태어난 서명숙씨가 제주 올레를 개발한 것은 고향의 경제에 이바지하겠다는 뜻보다는 상처받은 인간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데엔 자연보다 더한 보약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대학에 진학하며 제주를 떠났던 그는 언론계에 23년간 몸담고 살며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 속에 젖어 있었다. 심신이 지쳐있을 때 그를 가슴으로 안아준 것은 고향의 하늘과 바다였다.

경영진과 기자들의 대립 갈등의 골이 깊었을 때, 시사저널의 편집장이었던 그는 훌쩍 고향으로 내려와 옛 친구를 찾았다.

“비양도의 오름 정상에서 팔을 뻗으니 바다가 손에 닿을 듯 했습니다. 언제 이 하늘을 봤을까? 이 물빛은 또 언제 봤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어요.”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에 눌려 살았던 그는 그날 ‘더 이상 나를 불쌍하게 놔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회사에 사표를 내고 ‘휴식’을 택한 그는 우연히 ‘산티아고 가는 길’이란 책을 읽고 ‘진짜 걷는 여행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제의를 받고 다시 ‘살벌한’ 뉴스 현장에 뛰어든 그는 산티아고 길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첫 월급에서 일부를 떼어내 ‘산티아고 적금’을 부었다.

1년 뒤 여행경비가 될 만큼 돈이 모였다.

“뼈가 뿌순는다(안달나다의 제주방언) 해서 사표를 내고 준비작업에 들어갔어요.”

처음엔 가족과 주위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의 철심 같은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적어도 한 달간은 자신의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걸어야 하니까 강한 체력이 필요했다. 한강변에서 두 달간 몸만들기에 들어갔다.

언론인 생활 감연히 접고 나선 산티아고 대장정에서 영감 얻어

2006년 대장정에 나선 그는 프랑스 국경마을 ‘생 장 피 드 보르’를 출발, 종착지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36일 만인 10월 15일 도착했다. 출발할 때는 혼자였지만 길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산티아고 대성당 ‘영광의 문’ 앞에 당도했을 때는 수많은 순례자 친구들의 환영을 받았다.

힘든 여정이 끝났을 때 그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형형한 눈빛과 수도승처럼 맑은 얼굴을 확인했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온 그는 길에서 만난 영국인 친구 헤나와 했던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서 까마노(걷는 길)를 만들자’고 했던 약속을 실현한다.

산티아고를 걸으며 ‘간세다리’(게으름 부리기의 제주방언으로 그는 느리게 걷기로 표현한다)의 미학을 체득한 그는 자신의 고향 제주를 떠올렸던 것.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작은 오솔길들을 연결하면 바다와 들과 산을 모두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2007년 7월 올레를 개척하기 위해 제주에 내려왔을 때, 가장 힘이 됐던 이는 젊어 한때 ‘조직생활’을 하며 가족에게 걱정을 끼쳤던 남동생이었다. 정말 어려웠던 때 도와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그 동생이 몸으로 누이의 ‘오솔길 찾기’에 동반자가 돼 주었다.

그해 9월 8일 성산읍 말미오름에서 광치기 해변에 이르는 15㎞ 제주 올레 1코스 개장 행사를 했다. 2년여 만인 지난 9월 26일엔 15코스까지 열었다. 250㎞의 숨어있던 길이 사람들이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로 이어졌다. 그의 꿈이 절반은 이루어졌다.

지인들이, 주민들이, 지자체에서, 공무원들이, 해병대 군인들이, 특전사 군인들까지도 모두 그의 길 개척에 도움을 줬다.

“제주 해안가를 일주하는 500㎞ 올레를 개척하는 게 목표입니다. 다음은 산티아고 길을 세계인들이 걷듯 유네스코가 지정한 자연유산인 제주 올레에 세계인들이 오도록 알려야지요. 아스팔트 포장길이 아닌 흙길을 찾으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곳도 더러 있어요. 1960~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길 내기를 열심히 했잖아요. 그때는 주민들도 길 닦아주기를 원했고요. 올레코스에 목장이나 개인 땅을 내준 분들도 많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주민·해병대도 함께 길 만들어 ‘길치’가 기적 이루다

요즘 그에겐 ‘우리 마을로 올레코스가 지나가게 해 달라’는 이장님들의 민원이 많단다.

올레를 개척해온 그는 뜻밖에도 자신을 ‘길치’라고 했다. 가봤던 길을 찾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자꾸 새 길을 여는 걸까?

그는 올레에서는 가능한 한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즐기라고 권한다. 도시의 헬스클럽에서 트레드밀 위를 달리 듯, 경보선수처럼 걷는, 운동이 아닌 자연과의 호흡을 하란다. ‘놀멍 쉬멍 걸으멍’ 하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올레를 체험하고는 마치 간증하듯 그 효과를 전파하고 있다. 가슴속에 나만의 아픔이나 슬픔을 담고 살던 이들이 더러는 혼자 울기도 하며 소통의 에너지를 받아 간단다. 또 그들의 작은 후원들이 ‘사단법인 제주 올레’를 움직이는 데 힘이 되고 있다. 턱없이 부족한 살림이지만 그는 “돈 때문에, 돈 없어서”라는 얘길 하지 않는다. 기념품인 두건과 손수건 판매로 조금이나마 수익이 있고 친지들과 올레꾼의 후원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늘 걸을 채비가 되어 있는 소박한 차림, 가무잡잡한 피부에 잘 웃는 그의 얼굴에선 아기가 웃는 모습이 보인다. 언론계에 몸담고 치열하게 살았다면 당연히 내보일 법한 ‘독기’가 없다. 예전부터 장기였던 특유의 친화력이 올레 일을 하며 더욱 승화됐나 보다.

2년 안에 세계적인 제주 올레 페스티벌을 열 계획을 차곡차곡 진행하고 있는 그를 두고 ‘진정한 혁명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뭘 하나 새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그가 우리나라 관광문화의 트렌드를 확 바꾸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