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효과’ 살려 국정에 잘 반영하길
9·3 개각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정운찬(사진) 전 서울대 총장의 국무총리 발탁이다. 잠재적 대권주자로서 세종시 발언부터 논문 이중 게재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논란도 다양하지만, 여성계 역시 쉽게 잊지 못할 이력을 정 총리 내정자는 갖고 있다. 서울대 총장이던 2002년 이미 그의 여성의식이 도마에 올라 여성계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은 후 이에 즉각 대응해 어느 대학보다 발 빠르게 성폭력 예방대책을 세웠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한명숙 여성부 장관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면담 자리에서 정 총장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의 성과를 폄하하는 발언을 한 데서 비롯됐다. 그는 가해자인 신모 교수와의 인연을 언급하면서 사건 당시 피해자의 신분이 ‘조교’가 아닌 ‘조수’였다며 “조수라고 하는 것보다 조교라고 하는 것이 사회적 파장이 더 클 것이라 여성계 측에서 감안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어서 “여성운동을 할 때 (개인의 인권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조금 더 신중해야”한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실제 면담의 주요 화두였던 여교수의 일정 채용할당에 대해 “경쟁에 의해 교수를 선발하는 것이지 여성이라고 특별 배려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을 피력해 한 장관과 견해 차이로 말을 주고받던 중 우연히 나온 실언이었다.
면담 자리에 동석했던 여성부 출입기자 몇몇에 의해 그의 발언이 기사화되자 여성단체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특히 여성의전화, 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등 우 조교 사건을 지원했던 여성단체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정 총장의 발언은 대법원의 판결과 직장 내 성희롱이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을 거스르는 망언”이라며 즉각적인 해명과 공개사과, 직장 내 성희롱 예방 책임자로서의 견해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여성계로부터 ‘성폭력 예방주사’를 호되게 맞은 정 총장은 사건 후 두 달이 채 안 돼 신규 채용 교수 워크숍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도입하고, 정기적인 직원교육과 특별강연을 통해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16개 단과대와 3개 전문대학원에 학생부학장 또는 교수 1명을 성평등 자문교수로 선임해 해당 대학 구성원의 성차별 문제에 대해 상담하고 시정 사항을 건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교내 성희롱·성폭력 상담소의 예산도 100% 증액했다. 무엇보다 교내 성차별과 인권침해 사안을 심의하는 ‘성평등인권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교수 집단부터 학생에 이르기까지 교내 구성원이 성희롱과 성폭력의 가해자·피해자가 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정 총장의 일련의 신속하고도 ‘성 인지’적인 조치는 여성계의 비난을 잠재웠다.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가 정식 국무총리가 됐을 때, 그의 국정 전반에 걸친 조정·총괄 역할에서 남다른 성 인지 의식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미리 치른 ‘홍역’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