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사태에 북녘 아이 처지 얘기 못 해 안타까워

감격적이다. 올해 추석을 맞아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금강산에서 만날 예정이다. 남과 북에서 각각 100명씩 만날 수 있단다. 헤어진 북의 가족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의 수가 아직도 9만여 명에 이른다니 100명은 턱없이 목마른 수이기는 하다. 그래도 이렇게 만날 때마다 북은 남의 가족들이 있는 곳임을 느낀다.

그런데...어이없고 당혹스럽다. 임진강 상류의 물이 갑자기 방류되는 바람에 하류에서 휴가를 보내던 남의 야영객들이 큰 변을 당했다. 북은 미리 말해주지 않았고 남은 경보시스템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했다. 미처 북이 거두지 못한 어린아이의 시신까지 떠내려왔다.

하필이면 남의 경보시스템이 고장 나 있는 상태였으니 북이 미리 얘기해주었더라면 사람 목숨을 황망하게 놓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속상함이 크다. 남과 북이 서로 잘 통했더라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일이었다.

이산가족과 임진강, 한편에서는 설레고 다른 한편에서는 화가 난다. 참으로 오랫동안 남과 북은 만날 듯 만나지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북녘에 머리에 뿔 달린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평양 수학여행도 가능하지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앉는 것이 남과 북의 관계다.

그런데 이런 남과 북 사이 정치의 불협화음은 특히 북녘의 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정치가 덜컹거릴 때마다 북녘의 아픈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도움이, 제때에 필요한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어깨동무의 바람은 남과 북의 아이들이 평화롭게 만나고 함께 자라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북녘에는 아픈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먼저 건강해져야 반갑게 만나 어깨동무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피부색이 어떻든 쓰는 말이 어떻든 엄마의 마음은 모두 똑같다. 어린이어깨동무는 아픈 아이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북녘의 엄마들을 본다.

그 엄마와 아이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 요즘 같으면 편안하게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북녘의 엄마와 아픈 아이보다 먼저 남과 북의 정치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심란하고 엇박자인 정치를 넘어 아프고 속상한 북녘의 모습들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같은 이름 ‘코리아’(Korea)를 쓰는 분단국가다. 강줄기 하나로 이어져 있는 남과 북이다. 도움이 필요한 북녘의 아이들도 우리가 품어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다. 이번에 더욱 실감하였다. 임진강의 황망한 목숨들도 서로 말만 잘 통했어도 살릴 수 있었다. ‘같은 말’을 쓰는데, ‘말이 안 통하는’ 우리가 안타깝다. 통해야 한다. 그것이 서로를 돕는 길이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