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밤에 잘 쉬어서 그렇다 잖아요. 나도 부엌 퇴근 일찍 하니까 어머니한테 짜증도 안 내고 달콤한 말만 하잖아요"
행복한 여자의 첫 번째 습관, 과감히 퇴근하라. 우리 집 부엌 퇴근 보고서의 결론이다.

드디어 부엌을 별채로 옮겼다. 가장 큰 변화는 확실한 부엌 퇴근이다. 

“자, 이제 불 끕니다. 어머니, 나가셔요.”

“알었다.”

개운치 않아 하시는 어머니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한 발 먼저 나서시게 하고 부엌을 휘잉 한번 둘러본다.

식탁에는 먹고 난 접시와 사용한 수저들이 놓여있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냉장고에 미처 들어가지 않은 남은 음식들이 있는지, 가열대의 전기 코드가 뽑혀 있는지, 수도꼭지 잘 잠갔는지만 눈으로 ‘딴 딴 딴’ 최종 확인하고 전등불을 끈다. 탁 소리와 함께 부엌은 어둠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드디어 평화가 온다.

“그래, 여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 휴식이고 평화야.”

어머니와 둘이 마당에 앉아 달을 본다. 보름을 향해 가는 달이다.

“달만 있는 것은 깨끗해서 좋고 구름이 있으면 달이 움직이는 게 보여서 좋고….”

“어머니, 진달래꽃도 바위틈에 핀 게 더 예뻐 보여요.”

“맞아. 산에 소나무도 큰 바위랑 같이 있을 때 더 근사하더라.”

저녁식사 후에 이 얼마나 우아한 모녀의 대화인가.

“그런데 저 달도 우리를 보면서 이러지 않을까요. ‘인간들도 두 사람이 함께 나를 보고 있으니 좋다. 근데 저 머리 하얀 여자 분은 누구시지? 통 못 보던 얼굴이네. 저 집에 새로 이사왔나?’”

어머니는 내 잔등을 가볍게 탁 치시며 웃음 띤 눈 흘김으로 대답을 대신하신다.  

그동안 달 좀 보자고 하면 ‘이것만 하고…’ 그래서 내가 같이 거들다 보면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달보다는 잠에 가까워지게 마련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저녁 설거지를 아침으로 미루면서까지 밤에 할 일이 뭐가 있냐?”시던 어머니다.

“저 가로등만 없으면 달이 더 환하게 뵐 텐데. 너, 내일 면사무소에 전화해서 저 가로등 좀 낮춰 달든지 방향을 더 길가 쪽으로 돌려달라고 해라.”

“아이고, 우리 어머니가 부엌에서 조기퇴근하시니 이제사 거시적인 안목을 회복하셨네. 제가 내일 면사무소에 전화해서 그럴게요. 가로등이 우리 집 마당을 향해 빛을 쏘기 때문에 산수유가 열매를 못 맺는다고.”

“그러고 보니 진짜 산수유 열매가 안 맺힌다.”

“아랫집 은비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열매들이 깜깜한 밤에 영근대요.”

우리 동네 프로 농부인 그 할머니는 집 앞에 가로등을 달아주었을 때 면사무소에 가서 화부터 내셨다. 가로등인지 뭔지 누가 만들어 달랬냐고, 밤에 빛 쬐면 호박이 달리지 않는데 남의 농사 망칠 일 있냐고. 직원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편의’를 내세우자 ‘밤엔 사람이고 땅이고 다 쉬어야 하는 거야. 밤에 뭐 하러 돌아다녀?’ 결국 그 집 앞의 가로등은 철거되었고 올 여름에도 우리는 그 집 호박을 얻어먹었다. 윤이 반지르르 나는 청록빛 호박은 새우젓을 넣고 볶으니 달디 달았다.

“그래, 그 집은 호박이 참 잘 돼.”

“호박이 밤에 잘 쉬어서 그렇다 잖아요. 나도 부엌 퇴근 일찍 하니까 어머니한테 짜증도 안 내고 달콤한 말만 하잖아요. 이제 어머니 피부도 할머니네 호박처럼 반지르르 윤이 날 거야.”

얼굴을 쓰다듬어 드리자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가 웃으신다.

행복한 여자의 첫 번째 습관, 과감히 퇴근하라. 우리 집 부엌 퇴근 보고서의 결론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