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블록·주차장…‘화장실’ 사례만큼 설득력 없어
본질 왜곡과 희화화 피할 맞춤 교육자료 개발해야

지난 2006년에 제정된 국가재정법은 회계연도 2010년부터 ‘성인지 예산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하였다(제26조 등). 예산안은 통상 1년 전에 편성되어 10월 초까지 국회로 제출되므로 올해가 성인지 예산서를 작성하는 원년이 되는 셈이다.

필자는 이 법이 제정된 이래 지금까지 약 3년 가까이 성인지 예산서가 무엇이고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등을 연구하고 있으므로 성인지 예산제도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남녀 간의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 젠더(gender)에 대한 마땅한 우리 말이 없어 ‘성’으로 번역함에 따라 그에 얽힌 오해가 많고 ‘성인지(性認知)’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낯설기 때문에 더 어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성인지 예산이 뭡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일단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예산과정에서 고려하여 자원이 성평등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예산의 배분구조와 규칙을 변화시키려는 일련의 활동입니다”라고 답한다. 여전히 딱딱하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이 수행하는 역할이 같지 않고 욕구가 상이한 경우가 많은데, 이에 맞춰 예산자원을 배분하게 되면 예산집행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또 정책품질이 높아진다고 설명한다. 몇 가지 예까지 덧붙인다. 지금 정부가 대규모 중기 재정사업으로 펼치고 있는 녹색뉴딜사업이 성별과 무관해 보이지만, 토목사업의 비중이 크다면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대체로 남성 일자리일 것이다. 이처럼 의도하지 않게 여성과 남성에게 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밝히고 보완책을 마련하려는 것이 성인지 예산이다. 가정폭력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230억 파운드(약 46조원)에 이르므로 가정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예산집행이 매우 필요하다는 영국의 연구 결과도 소개한다.

이렇게 설명했는데도 어렵다고 하면 화장실 사례를 들게 된다. 여성의 화장실 이용 시간은 통상 남성보다 긴데, 여성 화장실의 변기 수는 남성 화장실의 대·소변기 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여성 화장실 앞에서는 늘 긴 줄이 있다. 그래서 신규 공공시설에서는 여성 화장실의 변기 수가 남성 화장실의 대·소변기 수와 같도록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다고 하면 대부분 “아, 그런 거군요”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극장이나 놀이동산 등 인파가 붐비는 곳이면 여지없이 여성 화장실 앞에 긴 줄이 늘어서고, 명절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여성 이용객들이 기다리다 못해 남성 화장실을 밀고 들어간 사건이 아직도 생생해서인가?

화장실 사례가 너무 애용(?)되다보니 식상한 사람들이 다른 것을 찾고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하이힐 뒷굽이 빠지지 않도록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것과 여성전용 주차장 등이다. 이 사례들은 화장실 사례만큼 감동을 주지는 못하는 듯하고 오히려 보도블록 교체가 다른 민생현안을 제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냐, 성인지 예산이 이런 것이냐 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례란 이렇게 되기 쉽다. 사례는 그 사례가 나오게 된 맥락에 연동되므로 일반화하기가 위험하다. 사례를 구석구석 따지다 보면 당연히 몇 군데 허점이 있게 마련이다. 사례는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주지만 사례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사례가 갖는 몇 가지 결함에 대해 제도 자체가 결함을 갖는 것처럼 공격을 당하는 등 본질이 왜곡 또는 희화화되기 쉽다.

이제는 사례가 갖는 한계를 이해시켜야지라고 마음을 먹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인데 성인지 예산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사례를 들어 쉽게 설명해주실 수 없을까요?” 그래서 “성인지 예산을 사례로 설명하면 그것이 다인 것으로 오해하게 되는데요” 하니 “아 그렇지만 너무 어렵거든요…” 한다.

에구구, 어쩌겠나. 성인지 예산의 본질에 좀 더 가까운 사례를 발굴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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