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
인도판 ‘헬렌 켈러와 설리번’…뛰어난 연기가 영화의 힘
“내 이야기 속의 세상은 다릅니다. 소리는 침묵으로 변하고 빛은 어둠으로 변하는 세상입니다. 이게 나의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곳, 그 세상에 어울리는 단 하나의 이름은 ‘블랙’입니다.”
영화는 주인공 미셸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미셸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얼마나 살 수 있죠?”
아직 세상을 알기도 전인 두 살 때 미셸은 갑자기 눈과 귀가 멀어버린 채 어둠 속에 갇혀 버리고 만다.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8세 소녀 미셸은 본능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아 손으로 집어먹고 손에 닿는 물건을 모두 집어던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괴성을 지르는 미셸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파벳은 원래 A, B, C, D, E로 시작되지만 너의 알파벳은 B, L, A, C, K로 시작되지.”
가족 모두 미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때, 그를 어둠에서 끌어내 빛으로 인도한 사람이 있었다. 특수학교 교사인 사하이는 아무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그에게 “어둠이 필사적으로 널 집어삼키려 해도 항상 빛을 향해 가야 한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손가락으로 말과, 소리, 단어 하나하나를 가르쳐 나간다. 깨달음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분수대에 빠져 온몸에 쏟아지는 물을 느끼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단어 ‘water’와 함께 미셸의 삶은 180도 바뀌어 버린다.
이처럼 ‘블랙’은 누구나 알고 있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미셸이 손으로 ‘water’라고 말하는 순간, 관객들은 익숙한 느낌으로 이야기가 나아갈 바를 예상할 수 있다.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사하이의 노력으로 장애를 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미셸이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까지가 전반부라면 후반부에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버려 백지 상태가 되어버린 사하이에게 이번에는 미셸이 선생님이 되어 자신이 배웠던 방식으로 세상을 가르치는 과정이 펼쳐진다.
화려한 영상과 음악으로 세련되게 포장됐지만 갈등이 만들어지고 해소되는 방식은 2000년대의 영화라 하기엔 너무 진부해서 가끔 실소를 머금게도 한다. 단지 타자가 느리다는 이유로 마흔 살까지 대학을 다녀야만 했다는 점이나 대학 졸업에만 집착하는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가족이나 사하이와의 관계 외에는 미셸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보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셸이 새로운 성취를 이뤄갈 때마다, 좌절에 빠질 때마다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감정이 북받치고 눈물이 흐르고 만다.
이렇게 스토리상의 허점을 보완하고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배우들의 연기다. 인도의 국민배우라 불리는 사하이 역의 아미타브 밧찬과 미셸역의 라니 무커르지는 놀라운 흡인력으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특히 미셸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8세의 소녀 아예사 카푸르는 첫 영화 출연임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들의 연기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블랙’은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 전체 관람가, 27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