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과 정책만으론 ‘다문화 사회’ 없다
예산과 정책만으론 ‘다문화 사회’ 없다
  • 황정미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09.08.14 10:30
  • 수정 2009-08-14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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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대해 무지하고 말도 못 하는’ 결혼이주 여성 지원 프로그램부터 수정돼야
낯선 외국인에게 기꺼이 친절 베푸는 호주의 한 할머니 사례 벤치마킹 해볼 만
“정말 반가워요. 저희 집에 저녁 초대를 하고 싶은데요.” 지난 7월, 호주에서 열린 작은 국제회의의 조촐한 리셉션에서 만난 호주 아주머니(!) 한 분이 서로 통성명한 지 채 30분도 안 되어 뜻밖에도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해왔다. “네?” “아, 좀 놀라셨어요? 그냥 초대하고 싶어서요.”

환갑이 다 된 이분의 이름은 마리안, 일곱 살 때쯤 부모를 따라 네덜란드에서 호주로 이민을 왔고, 언어와 문화 차이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성인이 되어선 자기처럼 호주로 이민 온 사람들의 영어 공부를 도와주는 교사이자 활동가로 일했다.

자신의 이런 경험 때문에 학자는 아니지만 이주 문제에 늘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근처 대학에서 열리는 아시아 이주 국제회의에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처음 만난 낯선 한국인들에게 나름대로 최선의 친절을 베풀고 싶었다고 한다. 이틀 뒤 나와 다른 한국인 일행은 마리안과 그의 친구들이 마련한 ‘홈 메이드 디너’와 더불어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이 작은 사건으로 나는 ‘아래로부터의 지구화’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요즘 지자체 곳곳에서 다문화 축제를 경쟁적으로 개최하며 아시아 음식과 민속춤들을 거리 공연에서 만나는 일도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다. 아시아 지역음식 전문 식당이 거리 모퉁이에 들어서고, 이주 여성 연극단, 이주민 방송, 이주민 출신 배우들이 등장하는 독립영화도 상영되었다.

그렇지만 생경한 정책용어로 차용된 ‘다문화’가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다문화 경험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아직 주저된다. ‘다문화’를 간판으로 내건 각종 사업과 프로그램들이 전국 각지에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지만,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다양성’이란 한국인에게 아직도 책 속의 용어, 추상적인 개념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요즘 이주 여성 지원기관을 찾아가면 상담과 한국어 교육을 담당하는 활동가로 일하는 이주 여성들을 더러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분들을 만날 때마다 억양은 다소 어색하지만 편안하게 풀어나가는 한국어 수다 능력에 감탄하고, 한국어와 한국 사회에 대한 지식, 취미활동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배우고자 하는 끊임없는 열정에 새삼 놀라곤 한다. 자격증도 따고,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고, 또 좋은 직장도 갖고 싶지만, 이런 꿈들을 집안 형편이나 자녀 양육 때문에 미루고 있는 이분들의 고민은 여느 한국 여성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최근 결혼이주 여성에 대한 정부 지원은 무엇보다 한국어 교육과 양육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90년대부터 결혼이주 여성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본다면 어느새 한국에서 수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들도 많아졌고, 그런 만큼 이주 여성들 내부의 차이와 다양성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초기 정착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중요하겠지만, ‘한국에 대해 무지하고 말도 못하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만으로는 부족하다. 먼저 온 이주 여성들이 나중에 온 이주 여성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인력 양성의 기회가 제공될 필요가 있다.

최근 만났던 한국의 이주 여성 활동가들이 20년, 30년 후 호주의 마리안처럼 이주민 행사나 학술회의에 참석하여 서로 경험을 나누고, 거기서 외국인이나 새로운 친구를 만나 서로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다문화 사회란 예산과 정책, 사업 프로그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따듯한 시민들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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