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만난 또 다른 세상
서른 살에 만난 또 다른 세상
  • 이재은 /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8.07 11:42
  • 수정 2009-08-07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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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토실한 D라인이 늘씬한 S라인보다 좋은 이유
임신부가 되고나서 깨달은 새로운 아줌마의 시각
솔직히 고백하면 임신 초기엔 많이 우울했다.

죽고 못 사는 커피를 즐기는 시간도 반납해야 했고, 아찔한 킬 힐이 내뿜는 매혹적인 스타일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고, 늦은 저녁 맥주와 치킨이 선사하는 시원하고 짭조름한 기쁨도 맛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 뿐이던가! 인생 최대 낙이던 친구들과의 신명나는 수다놀이에도 제한이 가해졌다. 외출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입덧도 문제였지만,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버스 속에서 한두 시간을 꼼짝없이 서있는 일이란 상상하기도 싫고 힘든 일이었다. 임신 초기엔 하루 종일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괜히 헛구역질이 나오고 조금만 서 있어도 어질어질 현기증이 나는 것만 같았다.

때문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 외출을 할 때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잽싼 발걸음으로 빈자리 찾기에 혈안이 되곤 했다. 어떤 날은 좀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노약자석에 떡하니 앉아 가슴보다도 작게 나온 배를 볼록 내밀고 “여러분, 나 임신부예요~ 난 여기 앉을 권리가 있다고요!”를 가슴속으로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귓가 너머로 들리는 쑥덕거림과 연세 지긋한 분들의 노여움을 감당해야 했다. 어떤 날은 아예 “젊은 여자가 참 버릇없고 경우가 없네. 당장 일어나게”라는 핀잔과 꾸지람에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떠야 했던 순간도 있었다. 엄연히 노약자석에 명시된 임신부, 그것도 가장 유산 확률이 높은 임신 초기의 임신부인데도 외출을 하는 날엔 언제나 빈 좌석을 위한 투쟁을 감행해야 했던 것이다.

‘나 임신부예요’라고 쓰인 스티커를 만들어 옷에 붙이고 다니고 싶은 마음과 ‘당신들은 어쩌면 그렇게 이해심이 없으세요?’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 놈의 세상이 각박하고 썰렁하기 때문’이라고 자포자기하며 서서히 빈 좌석을 위한 나의 투쟁도 서서히 끝나갔다.

“임신 사실을 알고, 우울하고 슬펐던 시간처럼 앞으로 남은 시간들도 불편하고 힘든 날만 가득할 거야.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들뿐이니 말이지.”

그런데 참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배가 볼록하게 나오면서 어딜 가나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줬고, 항공사, 음식점 등에선 가장 편한 자리를 안내해줬으며 신호 대기 차량들도 신호가 끝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세상 사람들이 착해진 것이다.

처음엔 사람들의 달라진 반응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그러다 이내 곧 깨달았다. 그들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란 것을. ‘언니’라 부르고 따르던 선배들은 조언했었다. 삼십대가 되면, 또 아이를 낳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거라고. 네모였던 각진 세상이 어느 순간 동그랗게 변해 있음을 실감하게 될 거라고 그녀들은 말했었다.

실제로 언니들이 조언했던 것처럼, 지하철 빈자리에 집착하는 아줌마들에게서 느꼈던 뻔뻔함 대신 가족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고단한 여자들의 희생이, 만성 관절염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힘든 노인들의 고단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 지하철 안을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던 어린 아기의 짜증나는 울음소리 대신 전전긍긍하며 아이를 돌봤을 초보 엄마의 애타는 소리가 들린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로 가는 길목엔 뭐가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변화된 여자의 생애주기만큼 조금 더 넉넉하고 여유롭게 변한 아름다운 세상이 놓여 있음을 배운다. 나의 토실토실한 D라인이 늘씬한 S라인의 여자보다 예뻐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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