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그리는 친손녀 윤주경씨
윤봉길 의사 그리는 친손녀 윤주경씨
  • 이은경 / 여성신문 편집위원
  • 승인 2009.08.07 11:26
  • 수정 2009-08-07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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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다정다감한 페미니스트"
가사·육아 분담한 평등부부…아내의 글선생 역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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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웅 / 여성신문 사진기자 asrai@womennews.co.kr
60여 년이 흘렀지만 8월 폭염 한가운데에 찾아오는 광복절은 우리에게 매번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떤 희생을 딛고 서 있는지, 그리고 그 희생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보상이 행해지고 동시에 일제 잔재에 대한 청산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을 것인지, 뿌듯함과 함께 답답한, 묘한 심정이 되곤 한다. 그러면서도 새롭게 발굴되는 독립유공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왜 광복절을 영원히 기억해야 하는지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따뜻한 위안이다.

윤봉길 의사의 친손녀 윤주경씨(독립기념관 이사)에게 남아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투사보다는 그 시대엔 극히 드물었던 페미니스트이자 비전을 지닌 교육자에 가깝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25세의 나이에 일왕의 생일을 맞아 중국 상하이 훙커우(홍구)공원에 모인 일본 수뇌부에 폭탄을 던져 치명상을 입혔다. 그러나 친손녀가 더듬은 흔적에선 의외로 세계 평화를 위해 몸을 던진 꿈 많은 청년이다.

“지금은 다 기념사업회로 갔지만, 할아버지가 쓰신 글들을 통해 그를 가깝게 느껴왔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떠나신 후 아들인 제 아버지께 자신의 아내를 맹자나 에디슨의 어머니 못지않게 훌륭한 사람이라 하면서 어머니를 깊이 존경하고 따를 것을 말씀하신 편지를 읽으며 아내와의 동지적이고 대등한 관계가 느껴졌다. 또 아내가 가사일로 바쁜 것을 보면 주저 않고 한 손에 아이를 안고 야학 교사 일을 하신 거라든지, 아내에게 손수 한글을 깨우쳐주신 것 등을 할머니에게 들으면 남녀차별 행태는 일제의 잔재가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평등 부부’였기에 윤 의사의 아내인 배용순씨는 생전에 그의 사형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6·25전쟁 이후까지도 상이군인이 귀향할 때마다 신작로에 나가 “저기 아버지가 오실 줄 모르겠다” 말하곤 했다고 한다.

윤 의사는 아내와 사이에 2남1녀를 두었지만 윤주경씨의 부친인 윤종씨만 57세까지 살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열 살도 채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배씨는 후에 아들이 6녀1남을 낳자 “손자든 손녀든 귀하게 기르겠다”며 앞장서서 평등한 가족 분위기를 만들었다. 윤 의사 자신도 생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못 되는 것”이 시대적 요구라고 말하고 있다. 

윤주경씨는 “할아버지의 의거 결심은 농촌계몽운동에서 비롯됐다. 나라의 독립 없이는 농촌생활은 나아질 수 없다고 확신하셨고, 그래서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신 것”이라며 “거기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거를 결단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범과 윤 의사의 관계는 “자기 목숨을 내놓는 일을 할 때 이를 헛되이 하지 않을 믿음이 없었다면 그런 일을 감히 하지 못했을” 그런 사이였다. 선대의 인연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져 백범 가족과 윤씨의 가족은 지금까지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윤씨는 특히 할아버지가 생전에 야학 교재인 ‘농민독본’에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은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생명 창고의 열쇠는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이라 쓴 구절을 읽으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고 한다. 시장 개방 후 요즘의 우리 농촌 현실을 정확히 짚어낸 혜안 때문이다.

손녀의 눈에 할아버지는 “지식과 삶이 하나가 된 삶을 산 실천적 지식인”이다. 윤 의사가 중국으로 떠나는 자신을 배웅하는 아내에게 물 한 잔을 달라한 후 아들을 품에 안고 “내가 외국 나가 돈 많이 벌어 공부 많이 시켜줄게”란 약속을 한 것 역시 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나라 전체를 잘 살게 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다짐으로 읽힌다. 때문에 윤씨는 할아버지의 의거 정신을 잇는 최선의 길은 ‘교육’에 있다고 믿는다. 그가 매헌 윤봉길 의사 장학재단에서 사무 자원봉사를 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광주일고, 동래고 등 독립운동에 많이 참여했던 11개 고교 학생들을 지원하는 장학재단은 70년대 윤 의사의 사당 ‘충의사’가 건립됐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 낸 금일봉에 뜻있는 이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태 만들어졌다. 후에 백범의 손녀 김미씨와 결혼한 김호연 빙그레 전 회장이 1억원을 쾌척해 한층 알차게 운영되고 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에게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혜택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0년대에 들어서야 유공자 후손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보훈처가 지원해줬는데, 이 방법이야말로 유공자 후손들이 정상적으로, 중산층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1대와 2대 유공자 가족이 시대 격변기에서 어렵게, 숨죽여 살았다면 3대에 가서 독립유공자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히, 밝게 사는 것도 교육 때문에 가능했다. 그외 친일파 후손이 잘 사는 것에 대해선 관심도 분노도 없다.”

윤씨는 인터뷰 말미에 “경제문제에 가려 광복이나 건국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젊은이들이 우리 할아버지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먼 나라 전설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로 진지하게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해 생전 그와 각별했던 김구(제일 왼쪽) 주석이 윤 의사의 가족과 함께했다. (왼쪽부터)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미망인 배용순, 아들 윤종(윤주경씨의 부친).
광복 직후인 1946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해 생전 그와 각별했던 김구(제일 왼쪽) 주석이 윤 의사의 가족과 함께했다. (왼쪽부터)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미망인 배용순, 아들 윤종(윤주경씨의 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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