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중심 시각에서 요구되는 높은 계급으로서의 ‘여성의 몸’
일하는 여성의 ‘몸’ 사고하는 여성의 ‘몸’ 만들기 고민할 때

여름이 되었다. 아직은 장마전선이 한반도 남북을 오락가락하며 연일 폭우를 쏟아내고 있지만, 이제 곧 해변의 계절이 될 것이다. 초여름에 들어서면 많은 젊은 여성들은 여름 내내 ‘드러날’ 몸에 신경을 쓰고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에 몰두한다.

내 주변에도 6월 이후 수면다이어트, 효소다이어트 등 각종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제 “살 빠지셨네요?”가 기분 좋은 인사가 되고, “보기 좋으세요”라는 말은 살쪘다는 의미의 은유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프로아나’라는 새로운 사회적인 다이어트 현상마저 일어나고 있다. ‘프로아나(pro-ana)’란 찬성을 의미하는 프로(pro)와 거식증을 의미하는 아나(anorexia)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신조어이며, 거식증을 동경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프로아나의 8계명은 다음과 같다. ①기름진 음식은 벌 받을 각오하고 먹으라  ②칼로리는 언제나 계산해야 한다 ③몸무게 저울이 모든 것이다 ④살 빼는 게 사는 길, 살찌는 건 죽음이다 ⑤무조건 말라야 한다 ⑥배고플 때는 화장실 청소를 하라 ⑦역겨운 행동을 해서 입맛을 달아나게 하라 ⑧혀를 면도칼로 베어서라도 먹지 말라.

이러한 외형적 현상을 단순히 지나치다고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이면이 있다. 대한민국의 여성들은 연령, 계급과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몸을 ‘계발’할 것을 주문받는다. 이제 몸은 노동력의 매매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포괄적인 형태의 육체자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육체자본이란 다양한 자원들을 축적하는 데 필수적인 권력과 지위 및 타인과 구별되는 상징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 여가, 지적 활동 등 여러 분야에 개입하고 있는 몸을 다른 형태의 자본으로 바꾸는 육체자본화는 실질적으로 경제자본(돈, 재화, 용역), 문화자본(교육), 사회자본(사회구성원들의 재화와 용역을 상호 간에 연결해 주는 사회적 관계망)의 형태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몸의 상품화를 비웃는 자, 무시하는 자들은 자신의 몸을 자본화하지 못하는 ‘능력 없는’ 여성으로 낙인찍히고 사회적 지위 상승을 꾀하기 어렵게 되었다. 특정한 몸이 사회적 계급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계급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성들의 딜레마가 있다. 높은 계급으로서의 ‘여성의 몸’은 더욱 더 여성스러운 것, 인간적인 활동을 하기에 부적합한 몸을 요구한다. 교환가치를 지니되 남성 자산의 부가물이거나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서만 그 가치가 존중되는 것이므로, ‘인간’으로서의 능력과는 점점 더 무관해진다. 무엇보다 강박적으로 몸을 계발하는 데는 시간과 에너지가 무한 투여되어야 하므로 다른 ‘몸적’ 활동과 능력을 계발할 기회 자체를 원천 박탈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지적능력과 노동능력이 퇴화된 외계인처럼 마른 여성들만 거리를 활보하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프로아나의 십계명을 잘 지킨다 하더라도 몸에 대한 불만과 콤플렉스는 끝장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뚱뚱하고 못생겼고 불만투성이인 얼굴을 지닌 존재로 서있다. 그 거울은 ‘시대적 기준’을 빙자한 ‘가부장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매일매일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니?”라고 묻던 백설공주의 계모 왕비의 일그러진 모습은 바로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된다. 계모 왕비가 한때 누렸던 영화는 백설공주에게 넘어갔고, 그 백설공주는 다시 계모 왕비와 같은 존재가 되어 쓸쓸히 죽어갔을 것이라는 교훈을 되새기자. 외모는 일시적인 자산이 되지만 영구하지도 믿을 만하지도 않은 것을.

외모 지상주의는 자본주의 상업화의 경쟁체제와 가부장제의 공모 현상이다. 그들의 틀로는 결코 성별 간, 계급 간, 인종 간 폐쇄적 구조를 무너뜨릴 수 없다. 이제 ‘아름다운 여성의 몸’이 아니라 일하는 여성의 ‘몸’, 사고하는 여성의 ‘몸’ 만들기를 고민하자. 건강한 ‘몸적’ 활동을 통해 승부하는 당당한 ‘나’를 만들자. 그러려면 오늘부터라도 당장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가부장의 거울’부터 버리자. ‘나’를 보고 있는 ‘나’의 시선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세상을 꿈꾸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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