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나를 위한 거울을 준비하자

까놓고 말하자. 시대, 성별, 나이, 계급과 상관없이 아름답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최근 검거된 폭력 조직 ‘이태원파’의 사례가 보여주듯 조폭도 그 자격 기준이 키 175㎝ 이상, 용모 단정의 꽃미남이 돼야 가능한 시대다. 초등학생부터 화장을 시작하는 현 시대에 어떤 이들은 성형을 ‘예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외모를 가꾸지 않으면 자기 관리를 못하는 게으른 사람으로까지 취급당한다.

아름다운 외모는 경쟁력이다. 불편하지만 사실이다. 이를 보여주는 과학적 사례는 이미 여러 차례 보고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본능임이 증명됐다. 하다못해 무조건적인 엄마의 사랑조차도 아름다움 앞에선 공정할 수 없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텍사스대 심리학과 주디 랭루와 교수가 산부인과 병동 및 산후조리원에서 첫 아이를 출산한 임산부 144명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 예쁜 아기를 낳은 엄마가 다른 엄마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아기를 안고 키스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내면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혹은 외모로 열패감을 느껴보지 않은 이들의 위선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라 과도한 집착과 아름다움에 대해 강요된 몰개성이다.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남과 비교하는 외모로 채우려는 이, 내면에 쌓는 실력을 외모로 대신하려는 이들에게 외모는 삶의 전부가 돼 집착을 낳는다. 타인과 끊임없는 비교 혹은 남성 등 타자의 시선을 위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욕망은 채워질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존중해서 얻어지는 유일무이한 자존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미의 기준에 맞춰 항상 비교에 시달려야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 재정립이 필요하다. 또 길이에 사람의 신체를 맞춰 신체를 잘라버리는 프로크라테스 침대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몰개성도 넘어서자.

사람은 몸 하나만 놓고 봐도 좌우가 비대칭인데, 우리 사회는 특정 사이즈의 ‘옷’이 ‘사람’을 입을 때가 많다. 또 다리를 길게 하기 위해 초경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는 등 외모지상주의에 따른 부작용이 대개 여성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 거미는 한 토크쇼에 출연해 강제로 성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신인 시절을 눈물로 공개해 규정된 외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 연예인들의 실태를 짐작하게 했다. 또 MBC 시사프로그램 ‘W’ 첫 방영 당시 최윤영 아나운서의 진행 솜씨 등 아나운서로서의 자질 대신 민소매 의상 논쟁만 벌어져 여성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천박함을 드러냈다. 일각에서는 한국에는 왜 오프라 윈프리같이 연륜있는 여성 진행자가 없느냐고 꼬집는다. 하지만 우리가 중년 이상의 할머니 혹은 날씬하지 않은 여성 진행자들을 브라운관에서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는지 먼저 반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외모가 아닌 그저 실력 하나만으로도 평가받고 승부를 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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