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인’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 속에서 순간순간 빛을 발하는 그의 따뜻한 유머는 한국 관객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아는 배우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프랑스 여성 감독의 데뷔작 ‘타인의 취향’은 국내 개봉 당시 장기 상영을 이뤄내며 한국에 아네스 자우이의 팬을 만들어냈고 뒤이어 개봉한 ‘룩앳미’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런 아네스 감독이 페미니스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시선을 보여줄까.
영화는 다큐멘터리 PD인 미셸과 영화감독을 꿈꾸는 아랍인 청년 카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성공한 여성들’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인 두 사람의 첫 번째 타깃은 정계 진출을 준비 중인 페미니스트 작가 아가테 빌라노바(아네스 자우이). 아가테는 집안의 가정부 미모나의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카림과의 인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하고 10일간의 짧은 여름휴가 동안 촬영이 시작된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도 어설픈 미셸과 카림의 영화 촬영은 실수 연발, 좌충우돌의 연속이다. 둘 사이의 사인이 맞지 않아 녹화 버튼을 누르는 것을 잊는가 하면 여분의 배터리를 잊고 와 모처럼의 야외촬영이 엉망이 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에 적대감을 가진 카림은 공격적인 질문만 던져대고 미셸은 전처와 아들과의 관계 등 자기 자신의 넋두리를 늘어놓기에 바쁘다.
설상가상으로 모처럼의 휴가를 인터뷰로 망쳐버린 아가테에게 연인은 이별을 통보하고 동생 플로랑스는 미셸과 사랑에 빠져 남편과 이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촬영을 거듭할수록 점점 산으로 가는 작업과 갈수록 꼬이기만 하는 주변 상황들. 급기야 초보 감독들의 실수로 중요한 정치 연설 기회마저 놓치게 된 아가테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소리치고 만다. “이런 덜떨어진 작자들하고 엮이는 게 아닌데!”
살아가면서 자신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리는 순간이 있다. 다큐멘터리 촬영과 함께 벌어진 예상치 못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잘나가는 페미니스트 작가로 자신이 옳게 살아왔다고 믿어왔던 아가테의 삶을 뒤흔든다. 주목받는 언니에 가려있던 플로랑스는 깊은 상처를 드러내고 카림은 아가테가 선의로 행했던 배려가 자신에 대한 일상화된 모욕이었다고 고백한다. 결혼도 아이도 원하지 않고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의 이기심이었음도 깨닫는다.
소나기가 내린 후에 더욱 맑아진 하늘이 펼쳐지듯, 예상치 못하게 마주친 위기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임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산만하게 펼쳐지던 영화가 힘을 갖는 것은 중반 이후부터.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법한 인간관계의 고민임을 깨닫게 된다. 영화의 미덕은 등장인물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는 감독의 캐릭터 구축 능력이다. 또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현재 프랑스 사회의 인종과 계급문제, 정치의식, 페미니즘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감독의 전작들의 팬, 혹은 ‘고품격 프랑스 코미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별다른 플롯도 없이 전개되는 이 영화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또한 갈등을 겪은 후 서로를 이해하고 각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는 다소 뻔한 결말은 아쉬움을 주기도 한다.
감독·각본·주연 아네스 자우이,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