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계 대부’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
‘산악계 대부’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
  • 김세형 /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09.07.10 14:15
  • 수정 2009-07-10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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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공존 파트너…동화된 삶과 문화 전파하고파"
한·네팔친선협회 회장으로 추대된 ‘영원한 산악인’…등반·사고에 국가지원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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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웅 / 여성신문 사진기자 asrai@womennews.co.kr
지난 6월 23일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열린 ‘네팔-문화, 자연 그리고 기회의 땅’ 전시회 자리에서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이 한국·네팔친선협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성공한 중견 기업인(㈜태인 대표이사)이면서도 영원히 산(山)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그이기에 이번 회장 추대는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최적임자’라는 깊은 공감과 함께 설레는 기대를 품게 한다.

네팔은 산악인들에겐 ‘마음의 고향’이지만 생명을 담보로 한 도전과 함께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이 신임회장의 일성 역시 “히말라야 등반을 비롯한 무수한 등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와 피해자 신변 처리를 위해선 무엇보다 네팔 정부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며 선후배 동료 산악인들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신속한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다하겠다는 각오였다.  

주한 네팔 명예영사 역임

이 회장이 네팔과 유달리 인연이 깊은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1980년 그는 등반대장으로 히말라야 마나슬루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후 수많은 ‘스타’ 산악인들이 배출됐지만, 1980년 당시 마나슬루봉의 태극기는 한국 산악인의 기개를 세계에 널리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주한 네팔 명예영사를 역임하기도 한 그는 “산악인들의 본고장인 네팔을 가보면 배울 것이 참 많다. 선한 눈빛, 욕심 없는 삶, 산과 함께 동화돼 사람이 자연의 일부가 된다”며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결코 타인을 가볍고 우습게 여기지도 않으며, 서로 동등하게 삶을 이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동시에 산을 사랑하기에 가능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은 이처럼 신실한 선물을 주는 동시에 인간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도 함께 던진다. 등정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고들이 바로 그것. 그 자신도 산악사고 한가운데서 생존한 사람이기에 머리를 떠나 가슴으로 책임감을 느껴왔다.

그는 1969년 발생한 눈사태로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동계훈련 중이던 산악인 18명 중 10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적 사고에서 살아남았다. 당시 이들은 히말라야 원정을 준비 중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2000년에 취임해 바로 지난해까지 맡았던 ‘한국등산학교 교장’이란 직책은 그에게 특별히 애정이 가는 역할이었다. 그는 “이인정이 곧 한국산악사”란 말을 들을 정도로 산악 역사 한가운데서 활약해왔지만 동시에 떠올리기도 괴로울 정도로 숱한 산악인들의 죽음을 목도해왔다. 때문에 그에게 등반은 목숨을 담보로 하기에, 또 이를 감당할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경우가 많기에 비상 대처능력이 아주 중요하다는, 몸으로 터득한 원칙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등반 기술뿐만 아니라 ‘산에서 살아남는 법’을 집중 가르치는 등산학교의 존재야말로 그에겐 아주 소중한 존재다. 8년간 등산학교 교장을 하면서 터득한 교육 노하우로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꿈을 품게 됐다. 바로 ‘국립’ 등산학교의 설립이 그것이다. ‘국립’으로 등산학교가 설립되면 등산 관련 교육기관이 확대될 것이고, 이를 통해 안전사고에 대한 예방과 대처능력뿐만 아니라 “산을 오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산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보기 때문이다. 기저엔 등산학교를 통해 “등반에 꼭 필요한 기술도 배우지만, 산이 인간의 가장 큰 스승임을 깨닫는 시간”을 기회로 선사받을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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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등산학교 설립이 꿈

산과 이 회장의 인연은 이미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은 종로구 누상동, 바로 인왕산 기슭의 동네다. 어릴 때부터 바위를 타고 놀던 소년은 고3 때 이미 ‘인왕 클럽’이란 산악회를 만들었고, 이 멤버들을 중심으로 속칭 ‘누상동파’가 형성돼 한국 등산계의 암벽 등반을 이끌게 됐다. 중동 중·고교, 동국대 시절에 이르기까지 산악부 활동을 쉰 적이 없었던 데다가 인생의 반려자 역시 산을 통해 만났다. 부인 구혜정씨는 LG그룹 창업자 중 한 사람의 딸로, 이 회장을 만날 당시 이화여대 법정대 산악부 주장으로 활동했었다. 1967년 베트남전에 자원한 것 역시 등산 장비를 구하기 위해서란 다소 엉뚱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미군 부대에 등산 장비로도 활용 가능한 장비가 널려 있다는 얘기를 듣고 1년 반 동안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한 시절을 보냈다.

산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곧장 사람에게로 이어진다.

산악인에서부터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위를 둘러싼 다양한 인맥은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이타적 애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엄홍길, 박영석, 오은선 등 스타 산악인들은 물론 마라톤의 황영조, 여성 최초 태릉선수촌장 이에리사(탁구), 역도의 장미란·사재혁 선수 등에 이르기까지 체육계 전 방위를 아우른다. 후배들이 훈련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하는 그림자 역할을 마다 않는 그를 두고 혹자는 “그가 후배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은 전폭적인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이 또한 그의 삶의 일부”라고 말한다.

특히 여성 체육인에 대한 그의 평가와 지원은 각별하다. 2005년 여성신문의 ‘미래를 이끌 여성지도자상’(미지상) 수상자로, 당시로선 여성계에 생소한 산악 분야가 추천돼 오은선씨가 수상자로 결정된 것 역시 이 회장이 큰 몫을 했다.

체육장학회 설립해 20년간 꿈나무 키워

그의 사랑은 스타 체육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꿈나무를 키우자는 것이 주된 목표였을 것이다. 차단기 및 반도체 모듈을 생산하는 그의 회사 ㈜태인이 ‘태인 체육장학회’를 설립해 불황이든 호황이든 20년간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충청도 내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유망 선수들에게 체육장학금을 지급해 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원 금액이 2억원을 육박하고 수혜자는 스포츠 각 분야 350여 명에 이른다.

2005년 3월 그가 ㈔대한산악연맹 회장에 취임한 것은 우리 산악계에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창립 43년 만에 드디어 순수 산악인 출신을 맞게 된 것도 기념할 만한 일이지만, 그의 취임 이후 우리 산악계의 양대 산맥인 한국산악회와 대한산악연맹의 오랜 반목이 해소된 것은 더더욱 행복한 결말이었다. 그 자신 한국산악회 부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골수 산악회 출신이지만, 이후 산악연맹 부회장을 거쳐 회장에 이르기까지 갈등의 한가운데서 묵묵히 조정자 역할을 해냈다. 양대 단체장이 한 자리에 앉는 것은 남북 정상회담만큼이나 어렵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지만, 그의 산악연맹 취임식에 산악회에서 축사까지 맡아주는 믿기 어려운 일도 벌어졌다.

산악계 묵은 갈등과 반목 해결사로 큰 역할

태생부터 산악인이지만 역설적으로 세상 한가운데서의 등반에 나름 성공해 인정받고 있는 그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아마도 산에서 비롯된 애정이 삶의 철학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결과이리라. 그는 월간 ‘산(山)’이 창간될 때 기자로 활약했고, 이후 생업은 따로 있으면서도 한국산악박물관, 한국산악도서관 등을 설립하고 월간 ‘사람과 山’ 회장으로 지금도 여력을 보태는 등 산을 구심점으로 여러 분야에 문화적 열정을 보이고 있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면에선 진정한 등산은 기록에 연연하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인정 회장의 유별난 산 사랑은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쾌거로 인지되는 그 흔한 ‘정복’이란 말의 폭력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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