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다. 어릴 때 장마철이면 새를 보면서 우중에 어디서 잘까 걱정을 하곤 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160일이 넘었다. 죽어도 영면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영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이런 슬픔을 방치할 것인가? 정부는 혹시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에 용산 참사 현장에서 어떤 낙서를 보았다. “아파트 한 평을 넓히려는 마음속에 폭력이 깃들어 있다.” 글을 읽는 순간 비명이 흘러 나왔다. 우리 안의 잘 살려는 욕망이 폭력이 되었다면, 결국 가난한 서민들을 죽게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파트 한 평 넓히려는 마음’은 무엇인가? 잘 살려는 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잘 살려는 마음이 잘못된 욕망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어제보다 오늘이, 또 오늘보다 내일이 발전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희망이 있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고, 촛불을 밝히는 마음이 있고, 새로운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2007년 더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투표소로 나온 많은 사람들이 현 대통령을 뽑았으리라.

그런데 과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한된 희소자원을 모두 흡족하게 소유하여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황금만능주의, 정글자본주의 하에서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1등만이 기억되는 사회에 사는 것을 말하는가? 현재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피 튀기는 활극장 속에서 만인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치는 모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얼마 전에는 각종 극한적 상황을 가정하여 ‘살아남는 법’이라는 만화 시리즈가 초등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다.

현재 유럽 복지 국가들도 경제난을 혹독하게 겪고 있다. 한국 20대 청년의 별칭을 ‘88만원 세대’라고 한다면 유럽에는 이와 비슷한 ‘1000유로 세대’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88만원 세대에는 없는 것이 유럽의 1000유로 세대에게는 있다. 즉 4대보험이다. 유럽의 청년들에게 4대보험이 있는 한, 그들은 오늘 비정규직 또는 실업자가 되어도, 큰돈이 없어도, 내 집이 없어도 큰 걱정은 없다.

4대보험은 ‘나눔의 정신’의 사회적 합의이자, 정치적 실천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꾸준히 정직하게 세금을 낼 수 있는 시민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런 시민을 더 많이 확보하려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을 폐지해야 한다. 또한 남들보다 더 많이 공공시설이나 사회적 재원을 쓴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이다. 그래서 일자리도 나누고, 소득도 나누고, 기회도 나눠야 한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누구나 잘 살려는 권리를 보장해줄 정직한 정치가와 인간적인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나누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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