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를 위아래로 구분하는 수직적 피라미드형 조직 형태에 익숙한 사람들은 남녀관계도 수직적 관계로만 이해한다. 이들에게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여성 상위’ 또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 상위’만이 있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주류를 이루는 수평적 관계란 매우 낯선 그림이다.

양성평등을 오해하는 어떤 사람들은, 양성평등을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수극’ 정도로 생각한다.

과거에 여성들이 겪었던 고통을 남성들에게 되갚아 주고, 여성이 차지하고 있었던 낮은 자리를 남성이 차지하고, 남성이 차지했던 높은 자리를 여성들이 차지하는 일명 ‘남녀 자리바꿈’으로 이해한다.

이런 식으로 양성평등을 이해하다 보니 양성평등에 호의적일 수 없다. 양성평등을 여성과 남성의 ‘제로섬 게임’으로 여기다 보니 결국은 남성을 불행하게 만드는 나쁜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양성평등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윈윈 게임’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별과 차이를 분별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차이를 인정하면서 차별하지는 않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윈윈이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은 신체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체적인 차이를 들어 우열을 따지려 든다면 이것이 바로 차별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녀가 태어나면 “고추 하나만 달고 나오지…” 하고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이 은연중에 남성을 우위에 두는 태도에 속한다.

남성을 기준으로 보면 여성은 하나가 부족한 듯하지만, 여성을 기준으로 보면 남성은 여분의 것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인 차이는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별분업에 익숙해 왔다. 실제로 여성과 남성에게 각각 더 잘 어울리는 일의 영역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별분업이 관리직, 특히 고위직에 여성이 맞지 않다는 식으로 나가버리면 이것은 성별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차별을 합리화하는 태도가 된다.

양성평등이란 지금까지 성별분리 및 성별분업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남녀 ‘차별’을 극복하고 남녀의 ‘차이’를 반영하여 남녀가 함께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단축하기 위해 필요한 리더십이 바로 성인지 리더십이다. 성인지 리더십을 발휘하는 리더는 조직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조건으로 여성과 남성의 형평성을 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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