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볼 때마다 그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는 흑인이지만 흑인이 아니었고, 백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남성이었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남성의 범주 속에 넣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 보였고, 더군다나 여성이라고 하기는 더더욱 부족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어른같이 살았으며, 어른이 되었지만 아이 같은 삶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이미지는 그가 의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결과론적 해석인가?

이제 와서 생각하니 화려함 뒤에 감춰진 그의 삶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간 삶의 당연한 이치’를 거부하려고 몸부림치는 이 세상과의 지독히도 외로운 싸움이었던 것 같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혼자 그렇지 않다고 외치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누군가는 언젠가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가치를 인정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힌다. 다행히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꽤 오랫동안 기억되어 매우 자주 재평가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리안 아이슬러는 ‘성배와 칼’이라는 책에서 여성의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서 인류의 미래를 예견하면서 양성, 나아가 모든 사람 사이의 평등이 선사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된 규범이었다는 증거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많은 학자들은 이 점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구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여성입상은 남성의 음란한 성적 대상이거나 여성의 다산성을 강조하는 원시풍요제의 표현이었다고 여기는 것이 이와 같다. 여성은 남성의 대상이거나 남성을 유지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남녀 모두의 분명한 숭배의 대상이었음이 도처에서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남성지배논리의 관점에서 여신의 존재는 지속적으로 거부되고 부정된다는 것이다.

이 점을 리안 아이슬러는 현대인이 폭력과 협박에 기초한 ‘지배위계질서’와 생명체의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는 ‘실현위계질서’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배위계질서가 우선시되는 체계에서는 폭력과 폭력의 위협에 기반을 둔 위계질서로 인해 개인적인 창조성이 억압될 뿐만 아니라, 가장 저급한 수준의 인간 특성이 강화되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자질들이 체계적으로 억압되는 사회체계가 구축될 수밖에 없게 된다.

마이클 잭슨은 지배위계질서 속에서 차별적으로 나뉜 흑백의 경계 위에서 마치 달 위를 걷듯이 그렇게 미끄러지면서 살다가 스러져간 것은 아닐까. 그러한 ‘경계지움’에 나도 암묵적인 동의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터넷에서 ‘문 워킹’을 보고 또 보면서 하루 종일 ‘빌리 진’을 흥얼거린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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