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가지 빛으로 ‘청춘’을 묶다
이대출판부 창립 60주년 기념 테마소설집 펴내
‘청춘’을 테마로 이화여대 출신 소설가 12명이 ‘이화,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소설집을 펴냈다. 참여 작가는 우애령, 이청해, 한정희, 김향숙, 정미경, 권지예, 김다은, 함정임, 배수아, 고은주, 오현종, 권리 등 1945년부터 1979년생까지 다양한 세대로 구성되어있다. 이들은 느슨한 공감대, 자유로운 발상, 거침없는 시선으로 이화에서의 청춘에 대한 기억을 열두 가지 빛으로 담아냈다.
이 소설집은 1949년 한국 대학출판부 1호로 출발한 이화여대출판부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기획됐다. 이 책을 기획한 김미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는 “이화는 단순히 하나의 학교가 아니라 시대, 사회별로 ‘뜨거운 상징’ 혹은 ‘왜곡된 은유’로, 즉 어떤 아이콘으로서 기능해온 측면이 있다”며 “이 소설집 속의 이화는 공백이나 얼룩, 흔적, 경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해설했다.
지난 24일 이화캠퍼스복합단지(ECC)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자리에 참석한 11명의 작가들은 각기 가지고 있는 이화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았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전업주부로 살면서 자신의 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딸의 이야기를 다룬 ‘그곳에 가면’의 저자 고은주 작가는 “이화인들은 ‘자의식’으로 대표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네가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의식이야말로 이 학교가 내게 준 선물이야. 끝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채찍질하게 만드는 힘을 나는 여기서 얻었거든.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여기서 많은 걸 얻었으면 좋겠어. 나처럼 후회하는 길을 선택하지만 않으면 돼. 아니, 어떤 길을 가든 자의식을 잃지 않고 당당하기만 하면 돼. (고은주, ‘그 곳에 가면’ 중에서)”
꼭 이화여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아도 이화의 이름으로 다양한 청춘들의 모습이 묘사되기도 한다. 명품 인생을 살고 싶었지만 엄마가 겪게 되는 불미스런 일로 초라한 처지가 백일하게 드러나는 ‘나’, 막연하지만 희망찬 청춘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담고 있는 ‘나’, 파리에 정착한 지 8년이 되었지만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나’ 등 여러 주인공들은 경계를 넘나든다.
“현은 청년을 바라보며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뜻인지, 모르겠다는 뜻인지 현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보들레르의 시처럼 아무도 심연의 밑바닥을 헤아릴 길은 없는 것 아닌가. 어쩌면 사람들은 가슴속에 깊고 검푸른 바다를 품고 사는 게 아닐까. (권지예, ‘딥 블루 블랙’ 중)”
이화 출신 작가들의 소설집이지만 이화에 대한 ‘경배’로 가득 차 있지는 않다. 화려하고 유복한 이화여대의 이미지 때문에 상처받고, 이화라는 강렬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 기억들도 담겨 있다. 특히 가장 젊은 작가로 참여한 권리 작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화여대생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현실을 냉철하게 담아내고 있다.
“등록금은 2만7000원인가 하는 액수였고, 당시로서는 특히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유복하고 화려해 보이는 사람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극서민으로 전락한 아버지가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이, 그의 인생이 끝나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초겨울 꽃잎처럼 애처롭다.(이청해, ‘밤을 건너는 사람들’ 중)”
“학교에는 갑부 집 딸들이 넘쳐났다. 그녀들은 10만원짜리 큐빅 핀을 머리에 꽂고 다니고 영문한 타임지와 테이크아웃 커피를 양손에 들고 학교를 돌아다녔다…반면 민서는 교통비와 밥값을 해결하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20만원씩 벌었다. 그러나 등록금과 책값은 언제나 문구점 주인인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녀는 학교 안에도 돈에 의한 계급이 형성되고 있음을 느꼈다(권리 ‘정박’ 중).”
이화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책장을 넘기며 느낄 수 있는 공감대 하나가 있다. 고통스럽지만 찬란한 청춘, 그 비릿하고도 아름다운 기억이 여기 이 책 한권에 모두 담겨 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