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포털에서 ‘여성’ 난이 사라졌다. 그런데 드라마에선 ○○태후, ○○여왕, ○○공주, ○○○시장처럼 여성 리더십 바람이 한꺼번에 불고 있다.

신규 취업률 하락은 물론이고 기존 취업 감소 통계에서도 여성은 단연 압도적이다. 96%에서 98%를 육박한다. 그런데 TV 광고는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아빠들에게만 용기를 북돋워준다.

가족 드라마의 지독한 가부장적 언설과 태도는 변함없는 지위를 누리는 듯하지만 이혼 요구는 20년 만에 대세가 뒤바뀌었단다. 이혼 요구의 65%가 여성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현실의 지표들과 가상의 이미지들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는 것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평등에 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성평등 개념은 본래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해결하고자 오랜 고난 속에서 만들어낸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가치다. 그런데 이 성평등의 요구 안에 남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형법에서 강간의 피해자를 부녀만이 아닌 남성도 포함하자는 제안이나, 아이 돌보는 아빠를 위해 남성 화장실에도 기저귀대를 설치하자는 공중화장실법 개정안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성평등 관점이 남성을 배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듯하다.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방지가 여성만을 피해자로 놓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성인력개발센터에 남성이 왔다고 해서 수강을 하지 못하게 한 적도 없다. 오히려 산업재해 보상에서 여성의 외모만 높이 따지는 것을 남성 차별로 보고 적극적으로 고쳐주기도 했다. 출산휴가에서 배우자 휴가를 도입하고, 육아휴직도 남성이 더 많이 쓰기를 권장한다.

정말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성평등 현안을 놓고 여성의 이익인지 남성의 이익인지 단순하게 재단하는 태도다. ‘여성’이 아닌 ‘성평등’을 강조하면 남성에게 이익이 되니 성평등이 좋고, 이러한 상황에서 ‘성평등’을 강조하면 ‘여성’이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식의 생각이다.

성평등은 이익과 손해를 가리는 저울에서는 제대로 측정될 수 없다. 성평등은 여성으로서 나 혹은 남성으로서 나에게 즉자적인 이익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성평등은 옳고 그름의 저울에서만 제대로 그 무게를 알 수 있다. 횡행하는 위기담론 속에서 생존경쟁과 효율성이 공익과 배려의 아름다움을 압도하는 요즈음 나의 주장과 선택은 어느 저울을 선호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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