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은 국회에서 수많은 몸싸움과 격렬한 감정적 행동, 혹은 사기와 협박들을 미디어를 통해 익히 보아온 터라 더 이상 정치가 고매하거나 이성적인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의 과정이자 결과인 것처럼 재현된다. 그리고 이성적 과정으로서의 정치는 ‘감성’을 배제한 것처럼 보인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은 상당수가 20~30대 젊은 여성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해석이 분분하다.

동아일보는 정치적 관심이 아니라 이 사건의 “드라마틱한 비극적 상황에 대한 연민”이 그들을 분향소에 오게 했다는 입장을 취했다. 여성들은 감성적이고 비정치적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재삼 강조하는 데 일조했다.

이에 대해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젊은 여성들이 정치적 문제와 무관하게 단지 연민을 느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난해 촛불시위 이후 소녀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일상의 문제들을 계기로 한 정치적 자각을 통해 중요한 자발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지난해 촛불시위에 앞장섰던 소녀들이 만든 ‘촛코’(촛불소녀 코리아)와 같은, 정부의 ‘막장 교육’에 분노하고 그들의 욕망을 말하고 떠들고 놀 수 있는 자유를 주장했던 소녀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와 5월 29일 노제, 이어진 6·10 민주화 항쟁 기념식이 열린 광장에 대거 돌아왔다.

지난해 촛불소녀들은 올해 대학생이 되었고, 선거권을 갖게 되었으며, 더 많은 수가 앞으로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 카페 ‘82쿡닷컴(82cook.com)’과 ‘소울드레서(soul dresser)’와 같은 젊은 여성 그룹들도 돌아왔다.

이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이유는 단순히 먹거리 때문이 아니라, 현 정부의 비민주적 정책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이들이 다시 돌아온 이유는 전직 대통령의 뜻하지 않은 자살로 인한 슬픔 때문만이 아니라, 정치적 타살로서의 자살을 허용한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비탄과 분노가 작용한 것이다.

모든 인식은 슬픔이라는 감정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는 탄생하지 않는다. 슬픔, 분노, 애정이 없는 이성은 싸늘한 지배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법치라는 이성적 개념으로 포장된 폭력적 정치의 허점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감성의 정치다.

슬픔, 분노, 공감과 연대감은 사람들의 내면에 깊은 상처와 기억, 그리고 감동과 열정을 남긴다. 촛코들과 젊은 여성들 중 많은 이들이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촛불을 켜고, 썩지 않을 작은 비석을 세우며, 정의와 진실, 인권과 자유가 숨 막히는 현실에 아프게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진정 일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되도록 가능한 시간과 노력을 바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그것이 제도정치든 사회운동의 정치든, 이들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과 소통하는 감성의 정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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