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가 우리에게 던지는 여러 질문들
약자의 어려움 해결 공정하게 수행할 ‘사회적 합의’ 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란 형식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이란 하나의 징후이며 거울이고 또 하나의 프리즘이다. 사건은 하나지만 그것은 복합적인 것의 구성체여서 그것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주고, 현실은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관계성과 그 균열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한국 정치사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겠지만, 한국 정치문화사 혹은 문화사에서는 새로운 장이 쓰일 사건이다.

이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이라는 직에 대해, 서민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의 어젠다,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는 인간으로서의 대통령이라는 인격에 대해 그리고 국민과의 관계 등에 대해 새로운 경험을 했고, 노무현 시대라는 것이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앎이 우리에게 어떠한 역사적 배움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필요할 것 같다.

아직은 많은 평가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애도와 추모의 기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지켜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와 “사랑한다”라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자. 많은 추모객들은 그를 무엇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는가. 후기 근대사회에서 그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일들이 있어야 했고,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묻고 싶다.  

한국 언론들은 그가 죽기 전 2개월 동안 언론을 통해 그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적극적이지 않지만 동조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그의 죽음 이후에 하게 되면서, 많은 미안함을 느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노무현 시대를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아비투스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명박 시대에 그의 도덕성을 비판하는 언론의 무차별한 공격, 부패 의혹에 대한 도가 지나친 디테일,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조롱을 정치적으로 읽기보다는 언론의 아비투스로 간주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격적 언설에 대해 강한 저항을 하고,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폭력 범죄자나 아동성폭력 범죄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도 떠드는 한국 사회가 전직 대통령과 그의 가족이 언론에 매도되고 그의 일상이 완전히 벌거벗겨지고 있었음에도 아무도 전직 대통령과 그의 가족의 인간적 존엄성과 권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인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도 정치적 매도와 공격으로부터 그들의 인권을 말하지 않았다.

유시민 전 장관은 “그분의 죽음의 원인은 정치적이었지만, 그분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인간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불쌍하지요”라고 했다. 이 말은 노 전 대통령의 처지를 가장 잘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정치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이나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해결하거나 타결할 수 있는 방식은 가장 개인적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인간적 방식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동질성, 연민, 그리고 사랑을 그에게 느끼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랑으로 그를 지킬 수는 없다고 본다. 무력한 사람들, 주변적인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 역시 많은 경우 정치적인 이유에서 발생되지만, 많은 경우 개인적으로 죽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을 지킬 수 있을까?

최소한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그것을 듣고 해소해줄 수 있는 기구가 있어야 하고, 이를 공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절차에 대한 사회적 합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절차와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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