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램은 인간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빚을 지는 자와 빚을 지지 않는 자’로 말이다. 말인 즉 옳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었더랬다.
고인이 되셨다. 이 때문이다. 지난 5월 9일 타계한 장영희 교수는 책에서 인간은 ‘속는 자와 속지 않는 자’로 나누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고 눙쳐 말한다. 언뜻 그럴 것만 같다. 그는 고백한다. 자신은 주로 ‘속는 자’에 속했노라고. 이 때문에 중국산 ‘부세’를 비싼 ‘굴비’인 줄로만 알고 제대로 된통 속았다 한다.(222쪽)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교수의 책은 세상은 살만하다고 ‘희망’을 담아 전한다. 한 개의 속임수는 천 개의 진실을 망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 개의 진실이 천 개의 속임수를 구하기도 해서다.
그렇기에 고인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는 9년 동안 월간 ‘샘터’에 연재한 글을 모은 에세이다. 에세이에서 우리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저자의 용기를 발견한다. 이뿐만 아니다. 희망이라는 기적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책은 독자에게 진짜 보물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저자가 직접 교정을 본 이 책은 물론이거니와 ‘내 생애 단 한 번’이나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제목을 단 고인의 책들이 지금 덩달아서 또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인지도….
그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목발을 짚고 눈비를 맞으며 힘겹게 도서관에 다니던 학생. 놀고 난 뒤끝이 허탈해서 밀린 일은 아예 쳐다보기도 싫었다는 교수. 20년 늦은 편지로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는 둘째 딸. 건우 이모. 자주 늦는 버릇 때문에 남들에게 민폐를 엄청 끼치기도 하는 장씨 가문의 여자. 그런가 하면 이웃집에 살던 봉수를 어머니와 추억으로 공유할 줄 아는 효녀. 먼저 말을 하고 보는 편인 자신의 성격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 사람. 돈이냐, 사랑이냐를 갈등하는 제자를 따뜻하게 감싸면서 사랑할 줄 아는 너무나 인간적인 스승.
그래서일까. 에세이는 평범한 일상을 담으면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아연 비범함에 놀라 아, 하고 그만 탄성을 지르게 된다. 예컨대 ‘내가 살아 보니까’(117~121쪽)는 특히나 좋다. 그대로 옮긴다.
“내가 살아 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라는 것이다. 명품 핸드백에도 시시한 잡동사니가 가득 들었을 수도 있고 비닐봉지에도 금덩어리가 담겨 있을 수 있다. (중략) 내가 살아 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내 보기엔 고 장영희 교수는 사람들에게 더러는 속았으나 자신에겐 결코 ‘속지 않았던’ 기적을 희망으로 보여준 셈이다. 그러니 어쩌랴. 우리는 ‘살아갈 기적’에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장영희/ 샘터/ 1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