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손숙의 어머니’

 

‘가정의 달’이라는 5월을 맞아서일까. 공연계에 ‘어머니’를 소재로 한 연극이 연이어 선보이고 있다. 올해 초 큰 성공을 거뒀던 연극 ‘잘 자요 엄마’와 ‘친정엄마와 2박 3일’에 이어 ‘어머니 연극’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손숙의 어머니’가 10주년을 맞아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막이 열리면 흰 두루마기를 입은 노신사가 무대 천장에서 내려와 등장한다. 그를 보고 밤참을 차려내며 반갑게 맞이하는 어머니(손숙). 삶의 넋두리를 늘어놓던 어머니는 함께 가자며 내미는 남편의 손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나는 안 간다, 아니 못 간다. 이대로는 못 간다. 내 할 일 다 마치고 입동 전에 갈라요.”

드라마 작가인 아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의 특기는 툭하면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아들의 일을 방해하기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날 꿈속에서 죽은 남편을 만난 어머니가 평소보다 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내가 우리 동네에서 인기 절정이었는데, 내가 고마 글을 못 배워갖고 이름을 못 날렸다.”

어머니의 가장 큰 한은 글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글을 배우고 싶었지만, ‘계집년이 글 배워 뭐에 쓰냐’는 아버지 때문에 문맹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외친다.

“아버지 왜 딸자식을 바보 만들려 하요. 내가 글만 배웠으면 박순천 같은 여자가 됐을기요. 이내 목숨 다음 생에는 공부 좀 하게 해주이소.”

동네 총각을 사랑해 미래를 약속했지만 처음 보는 남자에게 논 세 마지기에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 했던 어머니. 설상가상으로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고 그의 희망이었던 첫 아들은 6·25 피란통에 추위와 배고픔으로 잃고 말았다. 평생 지울 수 없는 한을 쌓아온 그에게 있는 것은 친정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신주단지뿐. 그 속에는 어머니가 평생 가슴 깊이 묻어두고 털어놓지 못했던 아픈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손숙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 분단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하면서 남편의 바람기와 혹독한 시집살이, 자식의 죽음까지 감내해야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학적이면서 가슴 절절하게 그리고 있다. 한 여성의 이야기에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 한데 엮여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는 그동안 지겹도록 반복된 주제. 자칫 식상해질 수 있는 주제를 극복하고 이 작품을 차별화한 것은 1999년 초연 때부터 10년간 어머니 역을 맡아온 손숙의 연기, 그리고 현재와 과거, 실제와 환상이 공존하는 독특한 무대 구성이다. 현대적인 아파트 안에 감나무가 들어오기도 하고 창밖으로는 고향마을이나 청진항이 펼쳐지기도 한다. 또한 벽이 돌아가면서 아파트가 초가삼간이 되고 다시 병원이 되기도 하는 등 기존의 연극에서 보기 힘든 다이내믹한 무대 전환이 인상적이다.

극의 구성에 있어서도 연극이라는 갇힌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다. 회상과 독백으로 전개되는 과거 회상 부분에서는 그 시절의 아이들이 등장해 뮤지컬처럼 춤과 노래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죽은 자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한바탕 살풀이굿이 펼쳐지는 등 전통과 현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흥미로운 구성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이다.

1999년 초연 당시 손숙씨는 20년간 어머니역을 맡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지난 10년간 11만7000여 명이 관람했다는 ‘손숙의 어머니’가 이번에도 그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 공연계의 ‘어머니 바람’이 계속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연출 이윤택, 주연 손숙, 5월 24일까지 동국대 이해랑 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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