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9일 헌법재판소에서는 한·일 청구권 협정 부작위 위헌확인 사건의 공개변론이 열렸다.

본 사건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 생존자 109명이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상대로 청구한 것으로, 핵심 사안은 1965년 한·일 정부가 맺은 청구권 협정과 관련해 양국 간 분쟁이 발생했을 때 국가에 남아 있는 법적 의무의 성격 및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는지 여부다.

그간 일본 법원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할 때 “1965년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법적 손해배상의 청구 권리가 소멸됐다”는 주장으로 사건을 기각했다. 반면 외교통상부는 지난 2005년 8월 한·일 회담 당시 외교문서를 공개하면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입장 차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 하여 헌법소원에 이른 것이다.

이날 필자는 약 세 시간 동안 벌어진 본 변론을 지켜보면서 여러 생각에 잠겼다. 먼저, 정부의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위임 권능 여부다. 한국 정부는 일본정부에 경제적 보상을 청구치 않고 진상규명 등을 촉구한다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담화를 원칙으로 삼아 피해자들에게 지원금 등을 통해 정부의 의무를 이행해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1965년 한·일협정의 체결 주역을 포함하여 대통령은 국민 기본권 수호를 위임받은 적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둘째, 본 법정은 민족주의 경향 속에서 일본 정부에만 따지던 식민지 불법행위의 책임을 한국 정부의 책임과 반성의 문제로 그 틀을 변화시킨 사건으로도 해석된다. 이 점에서 본 법정은 식민주의 유산을 자국의 집합적 청산의 문제로 보는 포스트 콜로니알(식민지)의 계기로 읽을 수 있다.

셋째, 본 사건이 미증유의 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라고 할 때, 젠더문제에 무관심했던 한국 정부의 책임과 한·일 협정의 해석은 반드시 짚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본 사건은 식민지 문제를 일본 정부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지내던 대다수 한국인들의 방관에 대해서도 자성의 계기가 된다. 1965년 한·일 협정의 혜택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경제개발의 과실을 누린 필자의 세대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동국제군사법정에서 일본제국에 의한 식민지 조선의 침해를 다루지 않았고, 국내에서도 식민지 부역자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법정을 가진 적이 없다.

이날의 변론은 한·일 협정 45년 이후 헌재라는 최고법원에서 역사 문제를 다룬다는 것만으로도 숙연하고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헌재는 6인 이상 재판관의 다수 의견에 의해서 헌법불합치 혹은 위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날의 열띤 변론에서 법정이란 하나의 언술의 장, 여러 입장이 퍼포먼스를 벌이는 무대(theater)라는 점이 잘 구현되었다.

다행인 것은 이날의 역사 기록이 헌재 자료실에 동영상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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