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폭력에 노출된 약자들의 최후 저항 수단
고 장자연씨의 죽음은 픽션이 실제화된 순간

한 여자 탤런트가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라 칭하며 자살한 지 한 달이 넘었다. 더디게만 진행되는 수사에 결말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 답답하던 차에, 청와대 행정관에 대한 접대와 불법 성매매를 수사 중인 경찰 총수가 재수 없으면 걸리는 것이 성매매라고 하여 사건의 ‘본질’을 자백해 버렸다. 그들에게 모든 것은 관행이요, 문화며, 일상이다. 소위 ‘걸린 놈’만 재수 없다.

그들의 관행에서 예쁘거나 어리거나, 둘 중 하나가 ‘여자’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예쁜 것’과 ‘어린 것’은 취약함과 연결되고 이는 착취와 폭력의 정당함을 제공하는 발판이 되어준다. 그들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배출하고 아무런 죄책감이나 불편함 없이 순간의 쾌락을 위한 상대로 취약한 ‘여성’을 택한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은 그 ‘여성’이 나와 다른 ‘어떤 여성’이라 생각하고 금을 긋는다. 기껏해야 ‘불쌍한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은 남성의 관습화된 시선과 행위 속에 모든 여성은 그 ‘어떤 여성’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로써 개인의 욕망과 쾌락의 이름으로 자기결정권을 가늠하던 똑똑한 여성들은 2009년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여전히 ‘여성’임을 알아차린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근사하게 분리시켰던 ‘진보적’ 페미니스트들도 그들이 여전히 ‘여성’으로 호명됨을 눈치 챘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해체하고 싶었던 ‘여성’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에 의해 굳건히 지켜진 철옹성이 되어 우리에게 손짓한다. 너는 여전히 ‘여자’라고.

일련의 사건들이 준 교훈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첫째, 성적쾌락에는 권력과 위계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에는 구조적인 성적 착취가 있고, 정경유착의 고리에는 교환되는 여성이 있으며, 권력자들의 놀음마다 동원되는 성매매와 인신매매 구조가 있다.

따라서 관련 수사에는 늘 성(性)역이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아직도 어떤 ‘여성’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불공정 거래와 계약, 성적 착취와 매수, 폭력의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여성’은 모든 여성들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둘째, 젠더는 고안된 픽션이지만 행위를 통해 구현되는 실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픽션을 통해 유도된 특정 행위의 결과이자 효과다. 행위의 대상이 되는 자에게 그 효과는 결코 픽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이란, 행위가 구현하는 실질적인 폭력성에 노출된 약자들이 선택하는 저항의 최후 수단이다. 고 장씨의 죽음은 페미니스트들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픽션이 실제화되는 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겐 좀 더 급진적인 젠더-섹슈얼리티 이론이 필요하다.

‘아름다움’과 ‘성적인 것’ ‘여성성’이 연결되고, 여성성이 자연스럽게 ‘취약함’으로 연상되는 사회에서 젠더는 섹슈얼리티와 분리될 수 없다. 대한민국 2009년, 여성은 여전히 가정과 노동시장, 미디어와 사회 속에서, 몸과 섹슈얼리티로 호명된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하고 일관성 있는 이론보다 정치적 올바름이다. 기존의 남성 중심적 이론들이 논리적 명징함으로 무장하여 여성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이들의 경험을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 약자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점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페미니즘이 다른 이론과 어떠한 차별성을 지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바로 이 지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적 착취 구조를 구성하는 상징적·실질적 질서들은 대한민국 남성 권력자들의 힘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