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민우회에는 오랫동안 누적된 몇 가지 조직문화가 있다. 별칭 쓰기(별칭이 없는 경우 게임이나 공모를 통해 수집하기도 한다)와 더치페이 문화(나이 많다고, 팀장이라고 지불을 강요하는 것도 차별이니), 나이와 학력 묻지 않기, 평등 이력서(주민등록번호와 학력 기입란을 제외한) 등이 그것이다.

조직문화가 뭐 별건가 싶지만 별칭 쓰기와 같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호칭부터 ‘일반적’인 직급이나 본명을 사용하지 않다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같은 민우회 활동가들조차 내 이름을 꽃감, 꼬감, 고깜 등 제대로 적지 않는 경우가 많고, 외부 사람들과 전화통화를 할 때 별칭을 이름으로 오해하거나 내 별칭을 듣고 상대방이 ‘풋’ 하며 웃음을 터뜨린다든지(사실 이건 민망하다), 왜 사무실에서 본명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불만 섞인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일들이 더 많다. 어딜 가나 외부인들이 민우회 활동가를 만날 때마다 왜 이름이 ‘바람’인지, ‘꼬깜’인지, ‘신기루’인지, ‘광년’인지 묻는 것은 일상이 됐고, 자신이 혹은 타인이 지어준 별칭을 소개하며 첫 만남의 어색함을 날려버릴 대화 소재가 생기는 장점도 있다.

또 별칭을 나누다보면 호칭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서로를 확인하는 매개가 나이일 필요가 줄어든다. 한 지역에만 몇 천 개가 넘을 것 같은 나의 본명을 한 번 듣고는 분명 까먹을 누군가에게 다시금 이름 석자 혹은 넉자를 되새김질 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편한가!(내 별칭을 까먹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다)

실은 민우회 대표와 처장, 팀장과 활동가 모두의 사이를 가로질러 별칭으로 서로를 ‘호명’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정치적 함의가 숨겨져 있었으니, 그것은 별칭 문화가 관계의 평등을 이끄는 주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백 번 천 번 ‘우리’는 평등하다, 평등해져야만 한다는 선언뿐인 말은 오히려 평등의 실현을 가로막기도 한다. 별칭 문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별칭 문화의 발판 혹은 별칭을 사용하게 된 역사다. ‘외부’에 평등을 외치는 것과 평등을 경험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진보와 보수, 차별과 평등 사이만큼이나 멀고 아득하다. 

이런 경험과 역사를 토대로 올해 민우회는 지난했던 조직 안에서의 평등의 실현에 대한 논의와 경험을 다른 시민단체와도 함께 고민하고 공유하고자 한다. ‘꽃보다 평등’이라는 봄의 이름에 ‘평등한 시민사회단체 조직문화 만들기’라는 꽤 묵직해 보이는 소제목 아래서 말이다.

당신에게도 나이, 성별, 결혼 여부, 성적 지향 등 때문에 농담 한 자락에, 대화 한 마디에 불편했던 경험은 없는지. 혹은 너무나 당연하게 누군가는 ‘질문’을 서슴지 않는지. 그것이 활동가로서 매일을 살아가는 단체 안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변해갈 수 있는지를 말이다.

민우회, 퍽이나 잘났다, 라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좋다. 끊임없는 과정에 몸담을 수밖에 없는 것이 평등이라면 민우회도 피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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