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들과 경제 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대학 교수, 발레단 단장, 설렁탕집 사장, 부동산개발업자, 화장품 회사 CEO 등이 모인 자리였다. 이들 중 요즘 가장 힘겨워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첫째는 예상대로 화장품 회사 CEO였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안 써도 그만인 화장품부터 줄인다는 것이다. 둘째는 발레단 단장. 기업 협찬이 끊긴 데다 표까지 안 팔려 울상이었다. 부동산 개발업자는 요즘 매물이 많이 줄긴 했지만 언젠가는 나아지지 않겠느냐며 담담했다. 설렁탕집 사장은 “요즘 손님들이 싸고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선호한다”며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대학 교수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나마 제가 형편이 제일 나은 것 같네요”라며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명문대 교수인 그는 요즘 대학원생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면서 외환위기 때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당시에도 취업문이 좁아지자 수많은 대학 졸업생들이 대학원으로 몰렸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제대로 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학생들 학업계획서를 보면 답답합니다. ‘백수가 되느니 학교나 더 다니겠다’는 식으로 오는 학생들에게 무슨 학업 열정이 있겠어요. 논문을 쓰다가도 취업만 되면 바로 그만두니까 학교 연구 실적에도 도움이 안 되죠. 그렇다고 갈 곳 없는 애들한테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솔직히 큰 문제예요.”

20대 중후반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회사에 취직하면 이것저것 배울 게 너무 많다. 실수를 해도 선배들이 귀엽게 봐주고 각종 잡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근성과 인간관계를 배운다. 그렇게 나이에 맞게 커야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될 즈음 비로소 선배 사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인생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역경을 견디는 힘, 인간관계를 조율할 줄 아는 유연성 같은 것들은 사회에 나가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대학원을 졸업하고 30대 중반에 신입사원이 되면 주변 사람들이 난감해 한다. 자신도 밑바닥부터 배워야 할 것들을 놓치고 선배들도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만 요구한다. 기초 없는 샐러리맨 생활은 자신에게도 큰 손해다. 배워야 할 때 배울 것을 놓치면 다시 배우기 힘들다.

제발 남들 대학원 간다고, 남들이 유학 간다고 따라하지 말자. 현실 도피성 유학은 유랑이 될 뿐이다. 불황이 10년 이상 계속되면 그때는 어쩔 것인가. 이들은 자신의 모든 원죄를 경제 위기에 뒤집어씌우고 손쉽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십중팔구 경기가 좋아져도 불황으로 산다. 현실에 단단히 뿌리박고 정면 돌파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현실 도피의 가장 큰 비극은 소중한 것들과 진짜 이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에 적응해서 살아나가려면 현실적인 노력들을 기울여야 한다. 두려워도 맞설 줄 아는 뱃심, 더러워도 참을 줄 아는 인내심, 힘들어도 견뎌낼 수 있는 체력 등 어마어마한 육체적·정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들을 하지 않고 인생을 쉽게 살려고 하면,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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