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더 이상 ‘물’로 보지 마"
"여자를 더 이상 ‘물’로 보지 마"
  • 오한숙희 / 여성학자
  • 승인 2009.03.20 10:39
  • 수정 2009-03-20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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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셈 들여다보이는 한나라당 미디어법 홍보물
일자리 창출과 연계한 통과 호소 의구심 불러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보았을 것이다. 방송 관련 학과에 다니는 대학생 4명의 얼굴과 함께 일자리 2만 개 창출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인 한나라당 이름의 미디어법 홍보물 말이다. 그 중 세 명은 여학생이다. 순간 박 PD가 떠올랐다.

박 PD는 방송 외주 제작사에서 여성 관련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기획한 30대 중반의 싱글 여성이다. 그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여고생 시절 내가 진행하던 ‘생방송 여성’ 프로그램을 엄마와 함께 보며 방송 일에 대한 꿈을 키웠노라고 해서 나를 살짝 흥분시켰었다.

방송 일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열정은 대단했다. ‘내가 하는 일이 여성들의 삶의 질을 높일 것’이라는 그에게 매료되어 필자는 자문료도 없는 회의에 즐겁게 나갔다.

지난해 초, 새해 첫 기획회의라고 나간 자리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는 연신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내막을 들어보니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그간 거래했던 방송사의 외주 책임자가 갑자기 호출을 하더니 딱 한 마디 하더군요. ‘세상이 바뀐 걸 알아야지’ 기획 중인 우리 프로그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제작이 완료된 프로그램들도 다 깡그리 죽게 되었어요. 아이템 코드가 맘에 안 든다는 거죠.”

MB 정권의 ‘급 우향우 역주행’의 서곡이었다.     

“우리 같은 외주 제작사들이야 방송사 입맛에 맞춰야 하는 팔자이니, 이제부터는 말해서 탈날 것 없는 연예인 사생활 이야기나 여자들의 말초적 관심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하겠죠. 편성에서야 변함없이 ‘여성 몫의 프로’라고 할 테지만 그런 거 하려고 이 길에 들어선 거는 아닌데….” 박 PD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의욕에 찬 젊은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발휘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대학생 딸을 둔 어미의 심정으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론을, 즉 국민의 언로를 좌우할 중차대한 미디어법이 일자리 창출과 연계되어 통과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언론계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KBS가 ‘현장의 진실’과 다른 ‘화면의 사실’을 방송했고 의식 있는 사람들은 문화방송의 민영화를 결사반대하고 있다. 미디어법이 통과되면 재벌 언론사주들이 방송사를 갖게 된다. 시사저널은 사장이 삼성 관련 기사를 인쇄소에서 마음대로 삭제하여 현장 기자들이 언론자유 수호를 외치며 새로운 잡지 ‘시사인’을 창간한 바 있다.

문화일보에는 현대와 관련된 비판적인 기사는 실리지 않는다. 언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이미 언론이 아니다. 공익의 대변자로서 권력을 견제해야 하므로 언론은 삼권분립보다 더 확실하게 분립되어 있어야 한다.

요즘처럼 삼권분립이 확실치 않은 때일수록 언론의 분립은 더 절실하다. 자칫 나라의 언로를 잡아먹고 일자리를 얻었다는 역사의 오명을 쓰게 된다면 2만 개 아니라 20만 개 200만 개라도 도저히 명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미디어법 홍보물에 여자가 3명인 것은 우연일까? 여성이 이렇게 75%를 점유한 것은 보기 힘들다. 고용에서 여성 차별은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불황을 맞아 여성 취업은 ‘꽁꽁 얼어붙었다’(여성신문 1011호 1면). 혹시 2만 개 일자리 중 75%가 여자 몫? 이 엄동설한에 아이고 웬 떡이냐!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무조건 미디어법 절대 강추!! 여자들의 몰표!!! 이런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광고는 대중의 심리를 철두철미하게 계산하여 만들어진다).

여자들을 아직도 ‘맹물’로 아는가? 작금의 현실은 우리 여성들을 ‘맹물’로 살게 놔두지 않는다.

대통령의 여성관은 후보시절 이미 내면의 일단이 드러났지만 MB 정권의 역주행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여성들이다. 불황으로 여성의 빈곤화가 가속되고 있지만 경쟁과 불경기에 치인 남자들은 역차별을 운운하며 여성정책을 견제한다. 여성부는 ‘있긴 한 거냐’는 비아냥을 사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직을 절반으로 축소한다는데 그리되면 당장 성희롱 성차별 시정 업무가 소홀해진다.

박 PD를 만나봐야겠다. ‘우리를 더 이상 물로 보지 마’ 합창이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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